여강 최재효 2009. 1. 27. 22:09

 

 

 

 

 

 

          

 

 

 

 

 

 

 

 

 

           유월에 내린 눈(6)

 

  

                                                                                                                                             - 여강 최재효

 

 


 

 "아씨! 아씨 ! 정신 차리세유."

 “아씨, 아아아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 어찌 이런 일이……."

 덕칠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칠보가 혼절한 박씨녀를 업고 근처 의원으로 달렸다. 청나라 심양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꿈에 그리던 집에 도착하였건만 얼음장 보다 더 차가운 시어머니

김씨의 냉대로 박씨녀는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참다못한 덕칠이 안 채로 들어가 김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마님, 소인, 덕칠이 입니다유.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유?”

 “그래, 오랜만이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네가 그 애와 함께 왔다고?”

 김씨는 덕칠이를 쏘아보며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네 마님. 소인이 아씨 마님을 청국에서 부터 모시고 왔습니다유.”

 “그래? 그럼 그 애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알겠구나.”

 

 “마님, 아씨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요. 이놈이 늘 아씨를 가까이서 보호하고 있었

습니다유.”

 “네가 지금 나를 속이려드느냐?”

 “마님, 정말입니다요. 믿어주세유.”

 

 “그 애와 네가 청나라 이춘연이라는 군관을 따라 갔다고 들었느니라. 심양

에서도 그 오랑캐 남자 집에서 기거하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처 노릇을

했다지?”


 ‘아, 큰일이로다. 어떻게 노마님이 수 천리 이역 땅에서 일어난 일을 손금

보듯 알고 있단 말인가?’

 김씨는 넘겨집으며 덕칠이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였다.

 

 “노마님, 아씨와 소인이 그 분 집에서 기거한 것은 맞습니다유. 하오나 아씨와

소인은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에 불과했습니다요. 정말입니다요

노마님.”


 “네, 이놈 !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내 그 계집이 어떻게 지냈는지

다 알고 있느니라. 그러니 너는 나를 속일 생각일랑 말아라. 그리고 그 계집에게

분명히 전하거라. 나는 그 계집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박씨녀의 시어머니 김씨는 냉랭한 어조로 말하였다.

 

 “마님, 안됩니다.”

 “안된다니? 뭐가 안 된단 말이냐?”


 “아씨는 심양에서부터 죽을 고비를 수십 수백 번을 넘기며 돌아오셨습니다유.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는데 하물며 아씨께서 천만리

머나먼 오랑캐의 나라에 끌려가셨다가 돌아오셨는데 이리 매정하게 내치실 수

있어유. 안돼유. 아씨를 받아주세유. 노마님.”

 “네 이놈, 감히 종놈이 상전을 가르치려 드는 거냐?”

 

 “그것이 아니구유. 개돼지도 나갔다가 제 집을 찾아오면 반기는데 어찌 노마님

께서는 착하디착한 아씨마님을 내치실 수 있어유? 너무하세유 노마님.”

 그때 잠자코 있던 박씨녀의 시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더니 대청말루로 나왔다.


 “여봐라. 저 놈이 입을 닥치도록 매를 쳐라.”

 마당에는 청국에서 박씨녀와 덕칠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남녀종들이 모두

마당에 나와 있었다. 정씨 집안에는 종들이 십여 명 있었는데 남자 하인인 덕칠

이를 비롯해 여섯 명이 있었는데 다섯 명의 남자 하인들은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

하고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대감 마님, 아씨를 살려주세유. 아씨는 아무 죄가 없어유. 대감마님, 아씨를 살려

주세유."

 “네 이놈들, 뭣들 하느냐. 저놈의 주둥이를 틀어막으라고 하는 명이 안 들리

느냐?”

 할 수 없이 남자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어 덕칠이 등짝을 후려갈겼다.

 

 탁-, 탁 -.  

 덕칠이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지만 주인은 계속 더 치라고 하였다.


 “대감마님, 아씨를 살려주세유. 그 험한 오랑캐 나라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아오셨습니다유. 그런데 어찌 이러실 수 있어유. 어찌유.

 “네 이노옴-, 종놈 주제에 감히 주인에게 대드는 것이냐?”

 

 “대감마님, 아씨가 가엾어유. 고향 찾아온 사람을 어찌 이렇게 대하실 수 있단

 말이어유.”

 “여봐라, 저놈이 아직도 정신이 덜 든 모양이다. 매를 더 쳐라.”

  땅바닥에 엎드려있는 덕칠이 등에 몽둥이찜질이 가해졌다.


 “대감마님, 아씨를 살려주세유.”

 마당에 모여 있던 여자 하인들은 차마 눈뜨고 매 맞는 덕칠이를 쳐다보지 못

했다.

 

 “대감마님, 아씨와 덕칠이를 살려주세요.”

 “대감마님, 노마님, 아씨와 덕칠이가 불쌍해요. 살려주세요.”


 마당에 모여 있던 남녀 비복(婢僕)들이 마당에 엎드려 정씨부부에게 선처를

호소하였다. 노복들의 간청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정씨 부부는 박씨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하였고 덕칠이를 집 밖

으로 내치라고 하였다. 흠씬 매를 맞은 덕칠이 대문 밖으로 쫓겨나다 시피

하였다.

 

 덕칠이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만지며 간신히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짐승도 아닌 사람이 제 집을 찾아

왔는데 집안에 들이지도 않고 내 치는 주인 부부가 사람이 아닌 저승사자 같

았다. 비가 오려고 하는지 갑자기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이 떨어

지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구.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이것이 조선

이라는 나라란 말인가. 이 빌어먹을 나라가 어떻게 제 백성을 내친단

말인가.”

 

 덕칠이 빗속에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불끈 치켜들고 절규했다. 지나가던 사람

들이 빗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는 덕칠이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 참 안

되었다는 시선을 보냈다. 덕칠이 울면서 칠보가 박씨녀를 업고 찾아간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에는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정진경이 도착해 있었다.

 

 "부인! 정말로 오셨구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다시 돌아오셨지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어머니께 말씀드려 부인을 집으로 들이도록 하리다.

정말로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진경은 부인 박씨의 손인 꼭 잡아 주었다. 그러나 심한 충격을 받은 박씨녀는

눈을 감은 채 말 없이 누워있었다.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연 박씨녀는 긴 한숨을

토하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남편 진경에게 서운함 심정을 토로했다.

 

 "서방님! 제가 괜히 돌아 온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오랑캐 땅에서 오랑캐의

여인으로 살다가 한 많은 세상을 마쳐야 할 것을 괜히 돌아와 분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다시 오랑캐의 땅으로 돌아가야 할까 봅니다."

 여인의 피맺힌 절규였다.

 

 "부인!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부인을 집으로 들이

리다.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보오."

 정진경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김씨에게 왜 박씨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치려느냐고 하자 김씨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 애가 오랑캐 땅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알게 뭐냐? 분명 그 짐승

같은 떼놈들이 그 애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 터, 난 그 애를 절대로 며느

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집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다시는

그 애 이야기를 꺼내지 말거라."

 

 “어머니,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우리 정씨가문에 시집와서 근영이, 근수를

낳아 정씨가문을 잇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을 내 칠 수 있

습니까? 어머니 안 됩니다. 그 사람을 받아주세요.”

 

 정진경이 아무리 하소연 해보았지만 김씨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안 된

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김씨는 박씨녀가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박씨녀를 버리

기로 마음먹고 정진경을 새 장가보내기 위하여 은밀히 며느리감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김씨는 자색이 고운 며느리가 오랑캐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것에 대하여는 가슴아파했지만 며느리 박씨녀의 운명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한양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머니

김씨의 태도는 완고했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서운하지 않을까?’

 정진경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김씨에게 더 이상 이야기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인 박씨를 잠시 처가로 보내기로 했다.

어느 정도 어머니 김씨의 마음이 누그러지면 다시 이야기 해보기로 하였다.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하시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그 사람을 받아들이시도록 말씀해

주세요.”

 

 “나 역시 네 어미와 같은 입장이다. 문중에서도 그 애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요즘 조정에서도 환향녀(還鄕女)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나 역시 그런 일에 휩쓸리고 싶지 않구나. 가문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흐흠 - .”

 

 ‘정녕 그 사람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정진경이 조정에서 당상관을 지낸 부친 앞에서 눈물을 보이자 정진경의 부친은

곰방대를 쪽쪽 빨아대며 아들의 유약함을 속으로 탓했다.


 ‘저런 멍청한 녀석을 아들이라고......’

  “아버님,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세요.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지금 한양

의 저자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환향녀의 멍든 가슴을 누가 어루만져 줘야하

느냐고요? 상감과 위정자들 모두는 병자년에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환향녀를

모두 궁궐로 불러 모아 그녀들에게 절을 하고 백배 사죄해야 합니다. 그 여린 아녀자

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내 치시는지요? 이건 아닙니다.

 

 위정자들이 져야 할 책임은 불쌍한 환향녀들에게 뒤집어씌운다면 그녀들에게

천추의 한이 될 것이며 천년만년 후손들에게 욕 먹을 것입니다. 아버님만이

라도 어머님과 가문의 어른들을 설득하시어 그 사람을 받아들여 주세요. 가문이

무에 그리 중요합니까? 사람이 더 중요하지요.”


 “사내대장부가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눈물을 보이다니. 쯧쯧쯧......”

 ‘이것이 조선 사대부들의 마음이란 말이더냐 이것이. 아아, 조정의 녹(祿)을

먹고 있다는 것이 이리 부끄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정진경은 마치 바위처럼 꿈쩍도 않는 부모의 완고한 태도에 절망하면서 속으

로 통곡했다.

 

 때마침 한양에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신풍부원군 장유(張維)라는

사람은 자신의 며느리가 병자년에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심양에 잡혀갔다가 천신

만고 끝에 돌아 왔지만 상감에게 아들과 이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장계(狀啓)를

조정에 제출하여 환향녀의 문제로 조정은 일대 회오리 속에 휘말려 있었다.

 

 상감과 벼슬아치들은 돌아 온 환향녀들에게 냉정했다. 어떤 벼슬아치는 자신의

딸이 돌아왔지만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환향녀들은

여론의 매를 맞고도 항변 조차 할 수 없었다. 환향녀의 입장에서 조정에 항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환향녀들 중에서 나이가 어린축들은 주막이나 유곽으로

흘러들어 몸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며 나이가 든

여인들은 전국을 떠돌며 빌어먹는 거지가 되기도 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주막에는 엽전 한 푼이나 국밥 한 그릇만 사주면 거리낌 없이

치마를 벗는 여인들도 부지기수 였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들에 대하여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 하고 있었다.

 

 "부인, 미안하오. 아버님, 어머님이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시는 구려. 잠시

친정에 가 몸조리를 하고 계시오. 조만간 내 부인을 집으로 들이도록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종중 어른들께 사정해 보리다."

 

 정진경은 남편으로서 멀리 오랑캐 땅에서 돌아 온 처(妻)를 건사하지 못한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덕칠이를 딸려 흥인문 근처에 있는 처가로 박씨녀를 보

냈다. 그러나 오랑캐 땅으로 잡혀간 딸을 오매불망 그리던 친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꿈 같이 살아 돌아온 여식(女息)을 반갑게 맞아 주면서도 죽어도 정씨

가문의 귀신이 되어야 하니, 즉시 시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제가 스스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저 혼자 천덕꾸러기가 돼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오갈 데 없는 딱한

신세가 돼야 한단 말입니까?”

 

 “얘야, 어쩌겠니? 아버님께서 저리 완고하시니 네가 아버지 입장도 이해 해

 주렴.”

 박씨녀 옆에서 누이의 생환(生還)을 기뻐하던 남동생이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

에 부아가 났던지 입을 씰룩거리며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아버지, 목숨을 걸고 사지에서 돌아온 누이를 어떻게 내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안됩니다. 누이를 거두어 주세요. 아버님의 자식 아닙니까? 절대로 누이를

거리로 내 치시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세요. 아버님.”


 “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일부종사해야 한다.

 그것이 이 조선의 법도이니라. 네 누이는 이미 박씨 가문에서 정씨가문으로 출가한

몸이니 당연히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야한다.”

 

 “아버님, 정씨가문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누이를 어찌 다시 그 못된 가문으로

가라하시는지요?”


 박씨녀의 아버지 역시 조정에 출사하는지라 조정이나 다른 벼슬아치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주변에서 자신의 출가한 딸이 오랑캐에게

잡혀 청국으로 잡혀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 된다. 이 삼일 쉬다가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죽어도 정씨네

귀신이 돼야 해.”

 박씨녀 아버지는 당장 딸을 내보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리할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을 억누르며 담배만 피워댔다.

 

 “아버님, 너무하십니다. 어찌 짐승도 아닌 딸을 그리 매몰차게 내보낸단 말

입니까? 너무하세요 아버님......”

 박씨녀 남동생은 친 부모까지 외면하는 현실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대진아, 울지 마. 나 한 몸 나가면 되니까 울지말거라.”

 박씨녀도 눈물을 흘리면서 남동생 등을 다독거렸다.


 “누이, 내가 당장이라도 그 놈의 집으로 달려가 다 때려 부술거에요.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단 말이에요. 어찌요?”

 

 박씨녀의 남동생은 두 주먹을 쥐고 방바닥을 내리 치며 대성통곡하자 박씨녀의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나가버렸다.


 “안 돼. 대진이 너까지 이러면 나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단다. 참아야 해.”

 “누이, 왜 참고 있으라는 거요? 누이가 뭘 잘못했다고 참고 있으라는 거요?”

 

 “그래도 안 된다 대진아. 네 조카들의 입장을 봐서라도 경고망동은 절대 금해야

한다.”


 박씨녀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랑캐의 나라에 잡혀간 것도 억울한 일이거늘

하물며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집안에도 들이지

않고 친정에서 조차 받아 주지 않자 극약이라도 있으면 먹고 자결하고 싶었다.

친정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 어찌 한단 말인가? 내가 왜 돌아와서 이런 수모를 당한단 말인가? 차라리

죽음으로 이 한 많은 세상을 마쳐야 할까?"


 박씨녀는 갈 곳이 없었다. 한양으로 돌아오면 남편과 어린 자식들 그리고 가족

들이 자신을 따듯하게 반겨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이 큰 짐이 된다는

사실에 박씨녀는 견딜 수 없었다. 덕칠이 다시 박씨녀와 함께 가까운 주막을

찾았다.

 

 "아씨, 어찌 한대유? 이 일을 어찌 한대유? 천지신명님도 무심하시지 목숨을

걸고 찾아 온 고향에서 이리도 박대를 받아야 한다니. 이런 몹쓸 놈의 세상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덕칠이 아씨가 측은하여 울음을 터트렸다. 박씨녀는 안개에 쌓인 목멱산을

응시하며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내일 다시 한 번 더 가보는 거야. 두 번 세 번 찾아가면 무슨 수가 생기

겠지. 아마 어머님도 마음이 달라져 나를 받아주실 지도 몰라. 내일 다시 한번

가보는 거야.’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모진 목숨 부여잡고 이역만리에서 돌아

왔지만 시어머니 김씨의 냉대로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불안했다.

 

 다음날 아침 박씨녀와 덕칠이 그리고 봉희는 다시 종로의 시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시어머니 김씨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고 남부끄럽다며 하인들을 시켜

박씨녀를 내쫓으려 했다. 박씨녀는 대문에 달라붙어 두 손으로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 -

 “어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아무리 박씨녀가 대문을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봐라, 어서 저년을 멀리 내쫓거라.”

 박씨녀 시어머니 김씨는 남자 하인들에게 며느리 박씨녀를 동네가 창피하다며

가능한 한 멀리 내 치라고 지시한 다음 소금을 뿌리라고 하였다.

 

 “아씨, 아씨 죄송하구먼유. 소인들은 노마님의 명에 따라 아씨를 멀리

가시게 해야해유.”

 “아씨, 이제 일어나세유.”


 나이 어린 남자 하인들과 나이가 좀 든 여자 하인들이 박씨녀에게 다가와

측은한 시선으로 박씨녀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태웠다.

 

 “너희들이 나를 아직도 상전으로 생각한다면 나를 저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다오. 나는, 나는 죽어도 이집 귀신이 돼야 한다. 죽어도......”

 “아, 아씨......”

 

 쾅쾅쾅 -

 “어머니, 어머니, 저를, 저를 내치지마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

세요. 왜 제가 이집에서 내쫓겨야 한단 말이에요?”

 

 “근영아, 근수야, 엄마다. 네 엄마가 왔어. 어서 문을 열어라. 얘들아, 엄마다.

어서, 어서 문을 열어다오.”

 

 박씨녀를 집에서 멀리 내쫓으라는 명을 받은 하인들은 차마 박씨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밖에서 계속 박씨녀가 대문을 두드리자 박씨녀의 시어머니 김씨는

두 손자를 안방으로 불러 들였다.

 

 “너희들은 이 할미의 말을 잘 들어야한다.”

 “네에, 할머니.”


 “지금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여자는 네 어미가 아니란다. 저 여자는 그 전에는

 너희들 어미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할머니, 어머니를 받아들이면 안 돼요?”

 큰 손자 근영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김씨에게 하소연하였지만 김씨는 두 아이들

에게 일침을 가했다.

 

 “저 여자는 오랑캐 나라에 잡혀가 오랑캐들에게 몸을 더럽힌 여자야. 아주

더러운 여자이니까 너희들은 절대로 저 여자를 다시 볼 생각일랑 하지말거라.

알았느냐?”

 

 “......”

 “......”

 “근영아, 근수야, 이 할미 말 알아 들은 거야? 응?”

 

 “......”

 “......”

 “왜 대답이 없느냐?”

 

 박씨녀가 낳은 두 아들들은 할머니의 명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직 어린 마음

이지만 며칠 전부터 오랑캐에게 잡혀갔던 어머니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인

들을 통해 들었고 두 아이들은 잔뜩 긴장한 채 밤잠을 못자고 어머니 박씨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할머니.”

 오랜 침묵 끝에 박씨녀의 큰 아들 근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근영아, 말해보렴.”

 “할머니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요. 저와 동생은 어머니를 보고 싶어요. 어머니와

옛날처럼 살고 싶어요. 할머니, 어머니를, 어머니를 받아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할머니.”

 

 두 손자들이 김씨에게 엎드려 울며 빌었지만 김씨는 두 손자의 간절한 청을 외

하였다.


 “근영아, 근수야, 저 여자는 네 어미가 아니라니까 그러는구나.”

 

 “할머니, 어째서, 어째서 저를 낳은 어머니를 어머니라 하지 말라고 하시는

지요? 할머니가 어머니가 오랑캐에게 몸을 버렸는지 보셨나요?”

 “뭐야? 너희들이 이 할미에게 대드는 거야?”

 “......”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이 할미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저 대문을

두드리고 있는 여자를 이 집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단념

하고 공부에 전념토록 하거라.”

 “할머니, 어머니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세요.”

 

 박씨녀를 꼭 빼닮은 둘째 아들 근수가 김씨에게 매달려 애걸하였지만 김씨는

어린 두 손자의 간청을 외면하고 말았다. 어린 손자들이 울면서 발을 동동 굴렀

지만 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할머니, 어머니를, 어머니를 용서하여 주세요.”

 “너희들은 이제 물러가거라.”

 손자들은 내보낸 김씨는 남자 하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쇠돌이를 불렀다.

 

 “내 좀 전에 어린 것들에게 대문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인을 멀리 내치라 했

거늘 아이들이 어려서 주저하고 있다. 너는 지금 대문을 두드리는 저 미친년을

집에서 가급적 멀리 밖으로 내 치거라. 다시는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 못하

도록 말이다. 알겠느냐?”

 

 “네에, 마님.”

 쇠돌이 대문을 열자 기진맥진한 박씨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쇠돌이가 얼른 박씨녀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줄 아느냐? 네놈이 감히 내 팔을 잡아.”

 

 찰싹-.  박씨녀가 쇠돌이의 뺨을 후려갈겼지만 쇠돌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쇠

돌이 박씨녀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남자하인들에게 눈짓을 하며 박씨녀를

끌어내라고 하자 그제야 나이 어린 남자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박씨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놈들, 이놈들 놔라. 내가 누군 줄 알고 너희들이 이러느냐? 이놈들, 어서

놓지 못할까?”


 “아씨, 죄송하구먼유. 저희들도 어쩔 수 없구먼유. 노마님께서 아씨를 멀리

내치라 하셨습니다요.”

 쇠돌이와 어린 남자 하인들이 박씨녀의 양 팔을 잡고 대로변으로 끌고 갔다.

 

 “놔라, 이놈들. 내가 누군줄 아느냐?”

 “아씨, 용서하세유. 저희들도 가슴이 아파유.”

  “쇠돌 성님, 아씨 다치지 않게 살살 잡으세유.”

 덕칠이 뒤 따라 오면서 훌쩍거리며 쇠돌이와 다른 하인들에게 주문했다.

 

 “이놈들. 어서 이 팔을 놓지 못할까. 이놈들아, 나는 이 집의 며느리란 말

이다. 어서 이 팔을 놓거라. 이놈들아......”


 남자 하인들은 쇠돌의 지시로 박씨녀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시장 통까지 끌고

갔다. 박씨녀는 하인들에게 끌려가면서 자꾸 뒤 돌아보고 큰 소리로 울면서

발버둥 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큰 구경이 난 줄 알고 몰려들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집에 왔더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박씨녀가 대로변에 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자 지나가던 여인들은 박씨녀의

모습을 보고 훌쩍거렸다. 어린 남자들은 숨을 죽이고 박씨녀를 보면서 시무

룩해 했고 나이든 남자들은 손가락질을 해대며 자기네들 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아씨, 일어나세유. 안 되나봐유. 노마님께서 아씨를 아주 버리실 모양인가

봐유. 일단 주막으로 돌아가세유. 길거리에서 이렇게 우시면 몸에도

안 좋아유.”

 

 “그래요 언니. 일단 주막으로 돌아가서 다음 일을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덕칠이와 봉희가 통곡하고 있는 박씨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박씨녀는

기운이 빠졌는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야, 이놈들아. 저리 안가? 무슨 구경이라도 났어?”

 벌떼처럼 모여든 행인들을 향해 덕칠이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대자

덕칠이 기세에 눌려 행인들이 흩어졌다.


 “아씨 안되겠어유. 저에게 업히세유.”

  “아냐. 덕칠아, 나 걸을 수 있어.”

 “안 돼유 아씨. 어서 업히세유.”


 덕칠이 간신히 박씨녀를 업고 묵었던 주막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음 날 또

그 다음날 박씨녀는 시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리며 통곡하며 시어머니

김씨의 선처를 바랐지만 김씨는 요지부동이었다.

 

 연약한 남편 정진경은 시어머니와 처 사이를 오가며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시아버지 역시 이역만리 에서 온 며느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내 너희들을 절대로 용서치 않으리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박씨녀는 오열 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대문 앞에서 통곡하는 박씨녀를

오히려 못된 여자로 간주하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며칠 동안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대문 밖에서 울고불고 애원을 하였지만 끝내 정씨가문의 도도한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진경은 조정에 출사도 하지 못하고 박씨녀가 찾아오면

박씨녀를 데리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일과 였다.

 

 "서방님, 제발, 제발 아이들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이들이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아요. 서방님, 이렇게, 이렇게 빌게요.“

 “부인, 어머님이, 어머님이 허락을 하지 않으시니 내 어찌할 도리가 없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서방님도 제가 미운가요?”

 

 “부인,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서방님이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강력하게 말씀드리면 될 것 같아서요. 언제

까지 제가 이 주막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요?”

 “저는 다시 청국 심양으로 돌아가 그 분과 백년해로 하고 싶답니다.”

 

 “부인.”

 “정말입니다. 조선이, 정씨 가문이 이렇게 냉정한 줄 알았더라면 저 한양에

돌아오지 않았을거에요. 진심입니다. 다시 청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들은

조선 사람들이 무지막지하다고 욕하지만 자신의 가족에게는 이러지 않아요.

조선의 거만한 사대부들처럼 체신만 찾지 않는다고요.”

 

 “부인, 미안하구려. 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서방님, 다시 한 번 문중의 어른 신들과 아버님, 어머님에게 간곡히 말씀해

보세요.”


  그러나 정진경은 어머니 김씨가 허락을 하지 않으니 어찌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정진경이 돈 얼마를 놓고 다시 오겠다고 하고 가버렸다.

 

 밤이 되어 천둥번개를 동반한 초여름 비가 한양의 밤을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박씨녀는 두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박씨녀는 흐느끼며 두 아이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근영아, 근수야......”

 

 “아씨, 울지마세유. 밤에 울면 건강에 안 좋아유.”

 “덕칠아, 나, 나 좀 시댁에 데려다 다오. 혼자는 다리가 후둘 거려 못가겠어.”

 “안돼유, 아씨. 가시려면 내일 날이 밝은 다음에 가세유.”

 

 “아니야, 아니야.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미치겠어. 아이들 얼굴이라도 봐야

겠어. 안 그러면 나 죽을 것 같어.”

 “아씨......”


 다행히 주막에서 정진경의 집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박씨녀의 간청에 따라 덕칠이는 박씨녀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찾았다. 다행히

비가 그쳤지만 땅바닥이 질퍽했다.

 

 쾅쾅쾅-.

 “근영아, 근수야 엄마다. 엄마가 왔어. 어서 나오렴. 엄마가 너희들이 보고

싶어 다시 왔어. 어서, 어서 엄마에게 오렴. 근영아, 근수야.”


 “근영아, 근수야, 엄마가 왔어. 어서 문 좀 열거라. 이 엄마가 너희들이 보고

싶어서 다시 왔어. 어서, 어서 이 엄마에게 얼굴 좀 보여 다오.”

 

 “대감, 저년이, 이 밤중에 저년이 또 왔수. 저 년이 이제 미친 게 분명하우.”

 박씨녀의 시어머니 김씨는 밤에 대문을 두드리는 박씨녀를 가리키며 혀를

내둘렀다.


 “참말로 끈질긴 년일세. 아니 이 밤에 와서 대문을 두드리는 저년이 정녕 미친

년이 아니고 무엇이어?”

 시아버지도 김씨의 눈치를 보며 박씨녀에게 욕을 해 댔다.

 

 콰쾅-. 천둥 번개가 치더니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영아, 근수야, 어서 나와 이 엄마를 보렴. 너희들을 안 보면 이 엄마는 살 수가

없단다. 어서 이 엄마에게 오렴. 어서.”

 

 “근영아, 근수야......”

 “아씨, 그만 돌아가세유.”

 두 식경 이상을 대문을 두드렸지만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사람들이 매정할 수 가 있단 말인가? 어찌......”

 비에 젖어 대문 밖에서 꼼짝 않던 박씨녀는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덕칠이는 얼른 박씨녀를 업고 주막으로 달렸다. 이틀 만에 깨어난 박씨녀

곁에 덕칠이가 흐느끼며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통곡으로 밤낮을 지새운 박씨녀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 죽기 전에 네놈들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보리라. 멸문지화를……."

 박씨녀는 입술을 깨물며 복받치는 설움을 곱씹었다. 며칠을 주막에서 보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조선의 잘못된 제도에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지를 고민

하던 끝에 기생이 되어 조선의 조정과 콧대 높은 양반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복수하는 거야. 이 나라와 거만한 양반 나부랭이들에게 보란 듯 복수

하는 거야. 복수, 복수......’


 박씨녀는 이를 갈았다. 짐승도 제 식구가 멀리 갔다 돌아오면 꼬리를 치며

반기거늘 가문을 이을 자식을 낳아 준 며느리를 미친년 취급하는 정씨가문

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덕칠이와 함께 한양 다동(茶洞)으로 향했다. 익히 남편 정진

경으로부터 다동에서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관리들 대접 할 때 다동골 기루(妓樓)

에 자주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기생이 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온상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 양반집 도령을 만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박씨녀가 시대를 잘못

만나 오랑캐의 성의 노리개가 되고,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찾았지만 시집과

친정에서 냉대를 받아야 하는 현실이 얄밉고 죽고 싶었지만 그냥 이대로 주저

앉을 수 없었다.

 

  오랑캐의 나라에 잡혀갔다 온 아녀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막에서 들병이 노릇을 하며 뭇 사내들의 음욕을 채워주고 입에 풀칠하거나,

마음씨 좋은 홀아비를 만나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특별한 방책이 없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 박씨녀는 다시 주막으로 돌아왔다.

 

 정진경이 주고 간 노잣돈도 거의 다 떨어져 갔다. 주모는 자색이 고운 두 처자가

며칠 동안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자신의 주막에서 묶고 있는 것을 보고 환향녀

라는 것을 직감하고 박씨녀에게 은근히 접근하였다.


 "이봐 샥씨, 보아하니 딱히 갈 곳도 없는 것 같은데, 우리 주막에서 그냥 잔심부

름이나 하며 나와 지내는 게 어때?"

 

 세상살이에 닳고 단 주모의 매같는 눈이 박씨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박씨녀가

아무 답변을 하지 않자 한마디 덧붙였다.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든 세상, 그깟 정조가 다 뭐 말라 비틀어진 거여.

잘 생각해보드라고."

 

 하루 종일 박씨녀는 방안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이미 수중에 돈이

다 떨어졌다. 주모는 매일 아침이면 방삯과 밥값을 받아 갔다. 이제 주막에서

 조차 쫓겨 나야할 판이다.

 

 할 수 없이 이 주막에서 기거 하는 동안은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다.

박씨녀가 주막 일을 거들어 주겠다고 하자, 주막을 자주 다녀본 경험이

있는 덕칠이는 말렸다. 주막에서 일을 거들어 준다는 것은 몸을 파는 들병이

와 매 한가지였다.

 

 "아씨, 안돼유, 지가 나가 돈을 벌어 올 테니 아씨는 가만히 계세유."

 덕칠이 아씨가 딱하기도 하고, 생전 막일을 모르고 살던 대갓집 여인이라 주막

일의 생리를 모를 것이기 때문에 극구 말렸다. 지금처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남자들이 할 일은 더더구나 찾기 힘들었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아는 박씨녀는

주모에게 주막 일을 거들겠다고 하자 주모는 반색했다.

 

 "참말루 잘 생각혔네, 잘 생각혔어."

 박씨녀와 봉희가 할 일은 부엌일을 도와주고 때에 따라서는 방에 들어가

술꾼들 잔심부름을 하는 거였다. 덕칠이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장작을 패고

무거운 술동이를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세 사람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않고 일을 해야 했다. 일하는 동안은 세상 모든 일을 잊을 수 있었다.

 

 주막을 찾은 술꾼들은 미모의 못 보던 두 여인이 나타나자 호기심이 일어 박씨

녀와 봉희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슬쩍 엉덩이를 만지기도 하였다.

 

 장마가 끝난 어느 비오는 늦은 밤이었다. 주모가 살며시 막 잠을 청하려는

박씨녀를 불러냈다. 선비차림의 헌헌장부 한 분이 독방에 들어 술을 마시는데

함께 마실 사람을 불러오라고 해서 박씨녀 보고 들어가서 말벗이라도 되어

주라고 부탁을 하였다. 주모의 간곡한 청을 뿌리칠 수 없어 마지못해 그 선비가

들어있는 방에 들어갔다. 혼자 술을 마시던 선비는 정색을 하며 박씨녀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혼자 술 마시기가 적적해 주모한테 사람 좀 불러 달라고 하였

더니, 달나라의 항아님이 강림 하셨구려."

 선비는 박씨녀를 보자 매우 흡족해 했다.


 "인사 올립니다. 소첩은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박씨녀라 하옵니다."

 박씨녀가 선비에게 반절을 하자 선비도 얼른 일어나 맞절을 하였다.

 

 "나는 경기도 여흥 땅에 사는 최선달 이라하오. 이렇게 어여쁜 항아님을 이런

누추한 주막에서 만나다니 정말로 큰 영광입니다."

 점잖게 생긴 풍모에 호감이 가는 잘 생긴 30대 초반의 헌헌장부였다. 최선달은

술과 안주를 더 주문하였다.

 

 "보아하니. 이런 곳에서 기거할 규수가 아닌 듯 한데 무슨 곡절이 있으신

게요?"

 박씨녀는 어쩌면 이 선비가 자신을 도와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자년

오랑캐에게 잡혀가 한양에 오기까지의 일과 시댁에 발도 못 들인 기막힌 사연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저런!저런, 몹쓸 인간들이 있나. 사람이 아니라 야차들 같습니다.“

 최선달은 박씨녀의 피 맺힌 사연을 들으면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박씨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분개해 하는 생면부지의 사내에게 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

했다. 어쩌면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멋진 사내라고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 그대의 시부모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도록 하리다."

 "나리, 아닙니다. 시어머니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박씨녀는 다소곳이 최선달이 따라주는 탁주를 마셨다. 주전자가 자꾸 비워질수록

박씨녀는 그 동안 누적되었던 피로가 일시에 봄눈 녹듯 했다. 밤이 이슥해지자

최선달은 타령조로 시조 한수를 읊었다.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떻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엇떻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최선달이 시조 한 수를 읊자 박씨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꿈같았던 지난 시간

들을 회상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울컥하고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즉석에서 자작시로 화답을 했다.

 

  멀고 먼 조선 땅을 한 걸음에 달려오니

  내님과 고향땅은 예전의 그 것이 아니네

  어이타, 이 내몸은 그 누구를 의지할꼬

 

 박씨녀가 흐느껴 울자 최선달이 살며시 안아주었다.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은 통

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내 냄새에 박씨녀는 순간 야생마 이춘연과 불태웠던

방사를 생각해 냈다. 최선달은 풋풋한 박씨녀의 살 냄새에 본능적인 감정이 서서히

발동하기 시작했다.

 

 “항아님, 참으로 곱습니다.”

 “......”

 “만리장성은 아니지만 천리장성이라도 쌓아보시려오?”

 

 “......”

 박씨녀가 대답 대신 살며시 두 눈을 감자 최선달은 박씨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박씨녀는 이춘연, 정진경, 덕칠이, 청천강 변 주막에서 자신을 강간했던 무뢰한

등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 올렸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