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9. 1. 27. 22:05

 

 

 

 

 

 

            

                

 

 

 

 

 

 

 

      유월에 내린 눈(4)

 

 

 

                                                                                                                                                                                   - 여강 최재효

 

 

 

 어두운 방 안에서 순식간에 박씨녀의 입을 막은 검은 그림자들은 큰 자루에

박씨녀를 담았다. 박씨녀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자루 속에 담기는 신세가

되었다. 자루 속에서도 박씨녀는 발버둥 치며 저항하였다.

 

 으음 -

 “더, 덕칠아, 덕칠아......”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아다. 다행히 그 틈에 덕칠이

깨어났다.

 

 ‘아, 여기서 , 여기서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안돼, 안돼......’

 박씨녀는 다시 한 번 몸부림치며 끙끙거렸다. 선잠이 들어 있던 덕칠이 그 틈에

눈을 떴다. 어렴풋이 남자들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놈들, 너희들은 누구냐? 어서 그 자루 풀지 못해?”

 덕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늘 지니고 있던 박달나무 지팡이로 두어 놈을 순식간에

내리치자, 한 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지고 나머지 세놈들은 도망쳤다. 

 

 2층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자 여관 주인이 무슨 변고가

생긴 걸로 짐작하고 뛰어 올라왔다. 방에 불을 켜고 방 안의 상황을 목격한 여관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 졌다. 머리가 깨진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박씨녀는

덜덜 떨고 있었다. 덕칠은 씩씩대며 두 눈을 부라리며 여관 주인에게도 몽둥이

세례를 퍼 부을 태세였다.

   

 “조선 놈이 감히 대 청국 사람을 죽여? 네놈이 간이 부었구나.”

 여관 남자 주인이 내려가고 얼마 안 있어 칼을 찬 청국 관헌인 듯한 사람 네 명이

올라오더니 다짜고짜 박씨녀와 덕칠이를 포승줄로 묶고 끌고 가려고 했다.

 

 “이보시오, 우리는 죄가 없소. 이놈들이 한밤에 들어와 사람을 납치하려고 해서

정당방어를 했을 분이오. 우린 죄가 없소. 정말이오. 우린 죄가 없단 말이오. 어서

우리를 풀어 주시오.”


 덕칠이 몸부림치며 항변하였다. 그러나 조선말을 알 리 없는 관헌은 무조건

두 사람을 끌고 가려했다.

 

 “놔요. 우린 아무 죄가 없다고요.”

 “이놈, 입다물라해.”


 “왜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려하는 거요?”


 퍽-. 관헌 한 명이 안 가려고 몸부림치는 덕칠의 등을 칼집으로 내리쳤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박씨녀는 덕칠이에게 조용히 하고

 일단 따라가 보자고 했다. 두 사람이 끌려간 곳은 그 지역의 안전을 담당하는

관청인 듯 했다. 박씨녀와 덕칠은 같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우리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요.”

 날이 밝자 두 사람은 붉은색 모자를 쓴 청국 관복(官服)을 입은 제법 높은 벼슬의

관헌 앞에 불려 나갔다.

 

 좌우로 하급 관헌들이 도열해 있고 각종 병장기들이 벽에 걸려있는 무시무시해

보이는 대청(大廳)이었다. 지역에서 각종 사건사고가 나면 처분을 내리는 곳

같았다. 고급관헌이 아랫사람들에게 귓속말로 간밤에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는 것 같았다. 고급 관헌이 다시 보고자에게 뭐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관헌이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간밤에 우리 대청국 사람을 살해했다. 너희는 지금부터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하렸다.”

 조선말이었다. 조선과의 국경이라 빈번한 국제범죄가 발생하여 조선어를 할 줄

아는 통역관이 있었다.

 

 “나으리, 저희는 죄가 없습니다. 그 자들이 저와 우리 아씨가 잠자고 있는 방에

들어와  우리 아씨를 자루에 넣고 납치해가려고 해서 제가 정당 방어했을 뿐입

니다요. 정말입니다요 나리.” 

 “네, 이놈, 입 닥쳐라.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네, 연놈들은 어디서 오는 길이며, 무슨 일로 청국에 왔었느냐?”  

 “네, 저와 이분.”


 “덕칠아, 가만히 있어라. 내가 대답하마.”

 “저희는 병자년 십이월 조선 한양 목멱산에서 귀국의 병사들에게 포로로 잡혀,

심양에 끌려 왔다가 우리의 주인에게 속가를 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

습니다.”

 

 “네 말이 틀림이 없으렷다?”

 “사실이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면되어 조선으로 가려했느냐?”

 박씨녀는 가슴속에서 종이편지 봉투에 꺼내 판관으로 보이는 관헌에게 보였다.

 

 [大淸滿洲八旗機務軍官 李春淵 - 대청만주팔기기무군관 이 춘연] 이라고 쓴 종이

직인이 선명히 찍힌 문서였다. 그 문서는 박씨녀가 포로로 잡혀 이춘연과 첫 밤을

보내고 난 뒤 이춘연이 준 정표였다.  박씨녀는 심양을 출발하면서 혹시 몰라

이춘연이 준 문서를 품에 지니고 왔다.  그 문서를 본 판관이 벌떡 일어나더니

하급 관리들에게 명하였다.

 

 “여봐라, 어서, 저 두 분을 풀어드려라. 어서”

 그 관헌이 박씨녀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이 분과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는 그분의 총애를 입고 있지요.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면 곧 그분도 곧 한양

으로 오실 겁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지금 즉시 심양으로 연통을 넣어 알아보

세요. 만약 그분이 내가 이렇게 모욕을 받으며, 고통 받는 사실을 아시게 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말씀 안 드려도 그 분이

누구인지 잘 아시지요?”

 

 “알다마다요. 저, 저희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 분은 곧

대청국 병부(兵部)의 최고 실력자가 되실 분입니다. 부인께 정말로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고급관헌이 박씨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비자 나머지 관헌들도

얼른 땅바닥에 엎드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런데, 간밤에 나를 납치하려한 그 자들은 누구인지요?”

 “아, 그자들은 이곳 마적들로 골치 아픈 놈들입니다. 한 명이 죽었는데 전혀

괘념치 마세요. 쓰레기 같은 놈들입니다.”

 고급 관헌은 연신 두 손을 비벼가며 박씨녀의 눈치를 보며 박씨녀가 선처해 주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알겠습니다. 내 조만간 그 분을 만나면 그대의 친절을 꼭 전해드리지요.”

 “아이구, 정말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어,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하명하소서.”

 관헌은 거의 얼굴이 땅에 닿을 자세로 박씨에게 아부하면서 불쌍한 얼굴 표정

을 지었다.

 

 박씨녀와 덕칠은 관청에서 삼사일 편하게 머물다. 압록강을 건넜다. 청국의

관헌은 박씨녀에게 노잣돈 까지 두둑하게 쥐어주었다. 압록강을 건너자 박씨

녀와 덕칠은 조선의 평범한 남자 복장을 하고 남행(南行)을 계속했다.

 

 땡볕이 날카로운 팔월이었다. 한양 가는 길목에 수많은 주검들을 보았다.

도로변 민가는 대부분 불에 탔고, 논밭은 메말라 있었다. 논에는 모가 심어져

있지 않고 잡풀만 무성했으며, 밭도 묵정밭으로 변하여 뱀과 개구리들만 우굴

거릴 것만 같았다.

 

 전쟁의 상처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초토화 시켰고 죽음의 대지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다 마주친 백성들의 얼굴에는 핏기조차 없어 보였고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해 피골(皮骨)이 상접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 추운 계절이 아니라서 동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사(餓死)자들의

시신이 길거리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박씨녀는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떠도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한양에

있는 두 아들 생각이 나 울컥하고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곤 했다. 가지고 있던

먹을 것이나 엽전 몇 푼을 아이들에게 집어 주며 아이들 등을 다독거려 주기도

했다.

 

 정주(定州)를 떠난 다음날 날이 저물어 청천강 나루터에 도착했으나 강을 건너는

 배는 없었다. 두 사람은 할 수 없이 허름한 주막을 찾아 들었다. 주막에는 이미

나그네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요기를 마친 박씨녀는 주막에서 하룻

밤을 보내야 되겠다고 판단하고 덕칠이에게 방을 알아보라고 했다.

 

 “아씨, 빈 봉놋방은 없구먼유,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합방을 해야겠어유.”

 아녀자의 몸으로 생전 처음 보는 남정네들과 퀴퀴한 봉놋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밖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실례합니다. 하룻밤 같이 보내야 겠습니다.”

 덕칠이가 서너 평쯤 돼 보이는 봉놋방에 들어서자 우락부락해 보이는 젊은

남자들 네 명이 투전을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장사치들 행색의 중년 남자

세 명이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잘 생긴 젊은이 투전판에 끼워 줄 테니 한판 놀아볼려우?”

 한참 투전에 열을 올리던 젊은 남자가 박씨녀를 보며 말을 붙였다. 남자의 생김

새로 보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같았다.


 “아, 우리 도련님은 투전을 모르오. 댁들이나 하시구려.”

 덕칠이가 목에 힘을 주며 받아넘겼다.

 

 “흥, 양반 나부랭이구만. 이 나라가 이렇게 된 게 그 잘난 양반 놈들 덕분이지,

모두 처 죽여야 돼. 암 죽여야 되고말고......”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패랭이를 목 뒤로 넘기고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가

역겹다는 말투로 박씨녀와 덕칠이를 번갈이 보며 한 마디 내뱄었다.

 

  “염병, 그놈 여자들께나 울리게 생겼구먼. 퉤 !”

 투전판의 한명이 남장을 한 박씨녀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한 마디 내뱄었다.

익숙하지 않은 남정네들의 공간인 봉놋방에 박씨녀는 은근히 위협을 느꼈다.

 

 그렇다고 다시 밖으로 나갈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덕칠이 행여 왈패들에게

박씨녀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어 눈을 부라리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방 안에 투전놀이에 정신이 팔려있는 자들이나 술을 마시고 있는 자들도

덩치가 만만치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씨녀는 방안의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덕칠이에게 다른 남자들에게

시비도 걸지 말고 그들이 뭐라고 시비를 걸어와도 두 눈 딱 감고 모른 체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덕칠이 아무리 완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덕칠이도 험상궂은 남자들의 기세에 약간은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상감인지 땡감인지 하는 작자는 큰소리 뻥뻥 치더니 오랑캐 놈들에게 머리

조아리며 굴욕적인 군신(君臣)관계를 맺어 목숨을 부지하고 우리 같은 무지렁이

들은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조차 없는 시국이 참으로 한탄스러우이…….”

 

 술이 거나하게 취한 한 사내가 박씨녀를 향하여 핏대를 높이며 불평을 토했다.

방금 전 덕칠이가 남장한 박씨녀를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이 이들에게 강한

거부감이 들도록 하였다. 덕칠이가 박씨녀를 방 한쪽 구석에 괴나리봇짐을

베고 눕도록 하였다. 투전판은 밤늦도록 계속되었고, 술자리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은 박씨녀에게 고통이었다. 남정네들의 발고랑 내와

술 냄새, 남자 특유의 냄새 등이 뒤섞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박씨녀는 땀

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 겨우 투전판과 술자리가 파했다.

 

 박씨녀의 뇌리에 두 아이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남편의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고 그 뒤로 시어머니

김씨의 무표정한 납빛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시아버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어머니 뒤에서 뒷짐만 지고 헛기침만 해대며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함께

비쳤다.

 

 멀리서 새벽닭 우는소리가 들렸다. 처음 봉놋방에 들 때부터 한 잠도 못잔

박씨녀는 머리가 아팠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빠개질 듯 했다. 비몽

사몽간의 상태에서 박씨녀는 무언가 가위눌린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자신의

 몸위로 시커먼 물체가 짓누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박씨녀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잠든 사람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곁에는 덕칠이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쉿! 소리치면 죽여버릴테다. 너, 여자라는 거 알아. 가만히 있어. 만약에

몸부림치거나 소리 지르면 이 칼로 네 목을 딸 테다.”

 남자는 어느새 비수를 빼들고 박씨녀 얼굴에 들이 대면서 묵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술 마시던 남자였다.

 

 ‘아, 이런 짐슴같은 놈.’

 박씨녀는 오들오들 떨면서 속으로 속삭였다. 남자는 재빨리 박씨녀의 하의를

벗기고 입을 막더니 자신의 뜨거운 것을 박씨녀 몸속 깊이 들이 밀었다. 오랜

기간 음욕을 해소하지 못한 탓인지 남자는 헉헉거리며 쉬지 않고 힘에 겨운

몸짓을 해댔다.

 

 흐흑 -. 박씨녀가 가늘게 흐느끼자 남자는 박씨녀의 입을 막았다. 남자의 입

에서 나는 술 냄새와 구린내가 너무 역겨워 박씨녀는 토할 것 같았다. 남자의 몸

짓이 격렬해 지면서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박씨녀는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과 덕칠이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했다. 남자의

가늘게 나오는 신음소리 이외에는 방안에는 코고는 소리만 진동했다.

 

 윽 -.  이내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박씨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 남자가

떨어져 나기기 무섭게 다른 남자가 살며시 땀으로 범벅 된 박씨녀의 배 위로

올라오더니 자신의 뜨거운 그것을 밀어 넣었다. 사내는 무엇이 급하던지

박씨녀 몸속에 그것을 넣자마자 뜨거운 것을 토해냈다.

 

 윽 -.  덕칠이는 곁에서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며 잠에 깊이 빠져있었다.

 ‘아, 도대체 조선이란 나라가, 그리도 그리던 조국이 색마(色魔)의 나라였단

말인가? 이것이 제발 꿈이었으면......’

 박씨녀는 여자로 태어난 자신이 죽고 싶도록 미웠다.

 

 여자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남자들의 시중이나 드는 사람쯤으로 취급하는

조선, 여자를 종족 번식과 쾌락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 존재할 가치가 없는

무인격체로 보는 시각, 박씨녀는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 뭇 남자들에게 윤간

(輪姦)을 당하면서 나라님과 위정자들을 경멸하였다.

 

 박씨녀는 세 번째 사내가 자신의 몸속 깊이 뜨거운 욕정을 분출 할 때까지

송장처럼 꼼작하지 않고 어서 행위가 끝나기만 바랬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

오기 시작하자, 박씨녀를 강간했던 사내 세 명은 바람처럼 방을 빠져

나갔다.

 

 흐흑-. 박씨녀는 조용히 일어나 앉아 땀으로 흔건한 몸을 닦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늘게 흐느꼈다. 무지렁이 산 도적 같은 무뢰배들에게 당하느니

차라리 이춘연의 품이 훨씬 좋고 다정다감했다.

 

 새벽닭이 울자, 봉놋방에서 잠을 자던 사내들 하나 둘 일어나더니 방을 빠져

나갔다. 박씨녀는 혹시 덕칠이가 자신의 몰골을 볼까 두려워 옷을 단정히 추스

르고 다소 곳이 앉아있었다. 밖이 훤해서야 덕칠이가 눈을 떴다. 

 

 “아, 아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덕칠이 속삭이 듯 박씨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응, 방금.”

 “편히 주무셨어요?”

 

 “응, 오랜만에 아주 단잠을 잤어.”

 행여 덕칠이가 눈치라도 챌까봐 엉뚱하게 대답을 했다. 주막에서 간단하게 국밥

으로 아침을 들고 다시 남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박씨녀는 바늘로 찌르듯 전해오는 하체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가다

쉬고를 반복하면서 남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주막에서 밤을 지새우기를 반복하며 며칠 후 평안도 어느 알 수 없는

고장에 다다르자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박씨녀와 덕칠은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가도 가도 민가는 보이지 않고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덕칠아, 아무래도 길을 잘못든 것 같구나.”

  “그러게요 아씨.”

 “어서 길을 재촉하자. 더 가다보면 집이 나오겠지.”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민가 한 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해가 넘어가 사방이 어두워 오기 시작했다. 높은 산 사이로 난 좁은 산길이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길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며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덕칠아, 어쩌면 좋으니, 산속에서 밤을 샐 수도 없고…….”

 박씨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멀리서 늑대와 알 수 없는 산 짐승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좁게 난 산길을 박씨녀는 덕칠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아무리 자신의 몸종

역할을 하는 덕칠이지만, 덕칠이 역시 혈기 왕성한 남자였다. 덕칠은 박씨녀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길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전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마치 산 도적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나뭇잎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덕칠아, 이러다가 짐승들에게 봉변이라도 당하는 게 아니니?”

 박씨녀는 우람한 덕칠이 팔을 잡으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아씨, 걱정 마세요. 이 덕칠이가 있는 한 감히 누가 아씨를 건드린단 말이

어유?”

 

  지금 박씨녀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덕칠이었다. 갑자기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번개가 자주 쳤다. 멀리서 천둥소리도

들렸다.

 

 “아, 어쩌나?”

 박씨녀는 발이 부르터서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천둥 번개는 점점

그 기세가 거세지면서 바람조차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곧 폭풍우가 들이

닫칠 기세였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다급해 졌다. 박씨녀는 억지로라도 발을

절며 걸어야 했다.

 

 “아씨, 제 등에 업히세유.”

 덕칠이 앉으며 듬직한 등을 들이 밀었다.


 “아니야, 괜찮아, 좀 더 걸어 볼게.”

 “아니에유, 아씨. 더 이상 그 상태로 걸으면 큰일나유. 어서 제 등에 업히

세유”

 

 “너도 힘들 텐데…….”

 “괜찬아유. 어서 업히세유. 어서유”

박씨녀는 마지못해 덕칠이 너럭바위처럼 든든한 등에 업혔다.


 ‘아, 이리 편한 것을…….’

 박씨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만약 덕칠이 곁에 없었더

라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니 덕칠이가 너무도 고마웠고 은인

(恩人)이었다.

 

 “아씨, 편하지유?”

 “응, 너무 편해. 고마워 덕칠아.”

 “아니에유. 조금만 가면 뭔가 나오겠지유.”

 비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덕칠은 박씨녀의 젖가슴으로부터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을 등으로 느끼면서

마치 자신이 박씨녀의 남편이라도 된 듯 한 착각에 빠졌다. 한 송이 연꽃처럼 티

없이 맑고 고운 아씨였다. 한양에 있을 때 어쩌다 후원을 거닐며 산책을 하는

박씨녀를 볼 때마다 덕칠은 박씨녀가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라고 생각했다.

 

 박씨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그만 넋을 잃어 밤마다 박씨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팔자를 한탄하곤 했다. 그렇게 천상의 선녀처럼 여기던

박씨녀를 자신의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고 가슴을 뛰게 했다.

 

 덕칠은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어 박씨녀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오면서 박씨녀의

운명을 직접 봐온 터였다. 한양에서부터 청나라 심양까지 가면서 이춘연과

늘 밤을 같이 보냈고, 심양에서는 이춘연의 본처 역할까지 했으며, 임신했던

일까지 아씨, 박씨녀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터라 어떤 때는 아씨가 측은해

보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양에 있는 주인인 정진경을 생각할 때면 야속

하기도 했다.

 

  박씨녀의 부드라운 엉덩이를 잡고 걷는 덕칠이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청천강변 주막집 봉놋방에서 무지막지한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한 후 박씨녀는

심한 정신적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 후부터 덕칠이에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다. 여러 남자들에게 강제로 빼앗기 정조(情操) 따위는 이제 호사가들이

지어낸 쓸데없는 허언(虛言)같다고 생각하였다.

 

 “아씨, 저기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덕칠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시커먼 물체가 집처럼 보였다.


 “그렇구나. 덕칠아, 이제 내려줘. 너무 힘들겠다.”

 “아니에유, 괜찮아유”

 

 그 물체는 반파 된 절간이었다. 본체는 처참하게 부서져있고 요사채같이

보이는 건물이었다. 분명 병자년 호란 때 오랑캐들이 불태운 절이 분명해 보였

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씨, 그냥 저리로 들어가야 할 것 같네유.”

 서너 평쯤 되어 보이는 요사채 건물이지만 두 사람이 비를 피하고 하룻밤 묵어

가기는 충분해 보였다. 천둥 번개가 머리위에서 치면서 비는 세차게 내렸다.

 

  캄캄한 세상에 가끔 비치는 번개 불빛만이 이곳이 지옥이 아님을 증명하듯

했다. 아니 이곳은 지옥이 분명했다. 바닥에는 이부자리와 스님들이 쓰던 바루와

옷가지 들이 널려있었다.

 

 “아씨, 죄송해유.”

 덕칠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러니, 덕칠아?”

  “죄송해유.”

 “뭐가?”


 덕칠은 곱디고운 별당 아씨인 박씨녀의 비에 젖은 모습에 그만 서러운 생각이

들었고, 하인으로써 잘 모시지 못한 송구함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빗발의 기세가

좀 약해지자 폐허의 골방에는 정막감이 감돌았다. 박씨녀와 덕칠의 숨소리만

칠흑 같은 방안에 가득했다.

 

 “아씨, 시장하시지유?”

 덕칠이 적막을 깼다.


 “아니, 난 괜찮아 네가 날 업고 오느라 애를 썼고, 배도 고플 텐데…….”

 

 그러나 캄캄한 첩첩 산중에 먹을 것을 찾는 다는 것은 신의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 한 일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굶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덕칠은

주변을 둘러보면 혹시 요기할 거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칠아, 어디 가려고?”

 “네, 아씨, 혹시 요기 거리라도 있을까 해서요.”

 “이런 깊은 산중에 뭐가 있을까?”

 

 덕칠은 절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박씨녀를 혼자 두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찾아본다는 일도 큰 위험이었다. 산속에 우글거리는

짐승들이 언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다. 덕칠은 박씨녀가 걱정되어 다시

절간으로 돌아왔다.

 

 타다 남은 절 석가래와 기둥으로 박씨녀가 있는, 반쯤 무너진 요사채를 안전

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옮겼다. 혹시 잠든 사이 산 짐승들이 사람의 냄새를

맡고 공격을 해 올수도 있기 때문에 허술하게 할 수 없었다. 문 입구에 단단

하게 방어책을 만들었다.

 

 “덕칠아, 네가 너무 고생이 많구나.”

 “아씨두, 참. 이정도가 뭐가 힘들다구유?”


 비가 완전히 그치고 거짓말처럼 하늘의 별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빛났다. 서쪽

으로 희뿌옇게 은하수가 흐르고 반달이 초연히 빛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한양의 서방님과 아이들은 무사한지?’

 박씨녀는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두 아이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착한 남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줄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의 좁은 방에 젊은 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박씨녀가 벽에 기대고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있고, 덕칠은 손에 몽둥이 한 개를

들고 만약의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아씨, 피곤하실 텐데, 주무세유.” 

 “그래, 너도”

 참으로 박씨녀의 체온이 덕칠의 어깨로 전해졌다. 덕칠이 박씨녀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아씨가 내 각시라면......’

 덕칠이 묘한 감정과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여자의 체온에 자꾸 자신이 이상해져

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박씨녀 역시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전쟁 통에 살아남기 위해서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고, 얼굴도 모르는 사내들

에게 윤간까지 당한 처지로서 정조에 대하여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가까이서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커컹 - .  한 마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울어대자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박씨녀는 이러다가 산짐승의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분명 사람냄새를 맡은 것 같

았다.

 

 “덕칠아, 무서워. 우리 이러다 저 짐승들한테 잡아먹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박씨녀가 덕칠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씨, 거 걱정......”

  “무서워.”


 박씨녀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 가슴을 파고들 듯, 덕칠이 가슴에 안겼

다. 산짐승들이 요사채 주변을 빙빙 도는 듯 이상하게 짖는 소리가 앞뒤

좌우에서 들렸다. 덕칠은 몽둥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놈들 들어오기만 해봐라.”

 박씨녀는 덕칠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꼼짝 않고 있었다. 주인아씨가 자신의

가슴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덕칠은 이제까지

가슴속 깊이 잠들어있던 이성에 대한 욕구가 서서히 머리를 들었다.

 

 '아, 안돼! 절대로 안돼!'

 잠시 아씨를 여자로 알고 민망한 생각을 했던 덕칠이 머리를 흔들며 속으로 외

쳤다. 박씨녀의 젖가슴이 덕칠의 가슴에 찰떡같이 붙자 덕칠도 더 이상 남자로서

 한계를 느꼈다. 산짐승소리가 잠잠해졌다.

 

 “아, 아씨…….”

 “응”

 “저어, 저…….”


 박씨녀는 덕칠이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음을 알고 살며시 덕칠이 손을 잡아주

었다.

 

 “덕칠아, 너는 나의 은인이야”

 “아, 아씨…….”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모두 네가 늘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야. 난 너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

 박씨녀가 덕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아, 아씨, 이러시면, 이러시면 ......”

 “덕칠아, 가만히 있어. 이대로 가만히 있어.”

 박씨녀가 덕칠이를 껴안고 쓰러졌다.


  “아, 아씨…….”

  “덕칠아, 나를, 나를 꼭 안아줘. 어서.”


 “아, 아씨.......”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죽은 몸이었을 거야. 너는 나의 하인이라기

보다 나의 은인이야.”


 “아씨.”

 “아무 말 하지 말고 나를, 나를 받아 줘.”

 

 “아씨.......”

 “괜찮아. 사내가 울면 안돼.”


 “아, 아씨........”

 “자, 어서.”

  

 좁은 방에서 격렬한 태풍이 일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사대부가의 며느리가 종과 통정(通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씨녀는 전쟁 통에 조선 양반사회에서 중요시하는 정절 따위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이 더 소중했다. 목숨이 붙어있고서 정절이니 절개니 하는 입발림

소리가 가능한 게 아닌가? 심양을 떠나 줄곧 덕칠이에게 의지하며 한양

으로 향하는 박씨녀에게 자신이 덕칠이의 상전이기 이전에 덕칠이 오히려

자신의 보호자이며 은인이었다.  

 

 아-. 덕칠이의 거친 몸짓에 박씨녀는 서서히 달아올랐다. 덕칠은 박씨

녀를 안으면서 이것이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면 했다. 박씨녀를 안으면서

덕칠은 주인 정진경을 생각했다. 정진경의 험상궂은 얼굴이 다가왔다.

거친 몸짓을 해 대던 덕칠이 갑자기 행위를 멈추고 박씨녀 위에 가만히

있었다.

 

“덕칠아, 왜 그래?”

“아씨, 죄송해유.”


“아냐, 괜찮아.”

“아씨......”

 다시 사내의 거친 몸짓이 이어졌다.

 

 윽-. 단말마와 함께 덕칠이 불덩이를 박씨녀 몸속 깊이 토해냈다. 땀으

촉촉이 젖은 남녀의 몸뚱이가 마치 정물화처럼 고정된 채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박씨와 덕칠이 속으로 희열과 자신들의 묘한

운명에 흐느끼고 있었다.

 

“아씨, 용서하세유. 죽을 죄를 졌구먼유......”

“바보, 울지 마.”

 박씨녀가 덕칠이를 꼭 안아 주며 등을 다독거렸다.

 

 덕칠은 박씨녀에게 동정을 바친 일에 대하여 몹시 행복하고 흡족해

했다. 이춘연과의 정사(情事)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의무감에서 이루

어졌다면, 덕칠과의 정사는 전쟁 통에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준

고마움의 성의였다.

 

“아씨, 이놈이 죽을 죄를 졌어유”

“아니, 난 네가 너무 고맙단다. 은인에게 답례를 했을 뿐이야. 너무

개의치 말어.”

 박씨녀 역시 덕칠의 팔베개를 베고 오랜만에 행복감을 느꼈다.


“덕칠아.”

“네?”

“참으로 이상하지? 너와 내가 예전에는 상전과 하인의 관계였는데, 이제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아씨…….”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