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9. 1. 27. 21:43

 

 






 

          

            

 

 

 

 

 


          유월에 내린 눈


 

                                                                                                                                                                                - 여강 최재효



  조선 인조(仁祖) 18년(1639년) 6월초순 아침, 한양에 때 아닌 눈이 내렸다.

그리고 제법 잘나가는 기루(妓樓)가 밀집 되어있는 다동(茶洞)의 태흥관에서

 희대의 살인사건이 터졌다. 칠십대 초반의 사대부와 이십대 초반 미모의 기생

이 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살인사건을 처음 본 태흥관의 주인인 퇴기 춘매는 덜덜 떨면서 기루에서 허드

렛일 하는 하인 덕칠에게 빨리 관할 좌포도청에 신고하도록 하였다. 곧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했던지 종사관(從事官)이 포도청 군사들을 대동하고 출동했다.

  군사들은 태흥관을 철통같이 경계하고 만일 있을지 모를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하는 듯했다. 종사관이 기방에 들어와 사건 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칠십대

초반의 사대부는 벌거벗은 채로 입가에 피가 묻어있고 반듯하게 이불위에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채로 숨져 있었으며, 미모의 젊은 기생 역시 벌거벗으채

입에 피가 묻어 있는 상태로 두 눈을 뜨고 숨져 있었다.

  옆에는 술상과 빈 주전자가 둥굴고 있었고, 화조도(花鳥圖)가 그려진 8폭

병풍은 간밤에 일어났던 비극의 참상을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두 변사체가 아직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숨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지럽게 펼쳐진 비단금침 역시 피로 얼룩져 있어 간밤에 벌어

졌을 법한 근엄한 사대부와 미천한 신분의 기생과의 질펀한 정사(情事)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여기 주인이 누구요?"

  눈매가 날카로운 40대 초반의 종사관이 춘매를 쏘아 보며 물었다. 종사관의

매서운 눈초리에 오금이 저린 춘매가 가슴을 움쳐 쥐고 겨우 소리내어 대답했다.


 "네, 쇤네가 주인인뎁쇼."

 숨진 젊은 기생의 젖가슴과 음부를 살피며 야릇한 미소를 짖던 종사관의 시선이

다시 춘매의 눈에 꽂혔다. 포도청의 악명을 익히 들어 온터라 춘매는 포도청에서

나온 관리들만 봐도 오금이 저려오곤 했다.

  "이 남자를 아시오? 그리고 이 기생의 기적(妓籍)을 대시오."

 춘매는 종사관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말투에 다시 한번 오금이 저렸다.


 "이분은 정대감이라고 하는데 함자는 모르겠습니다요. 그리고 이애는 추랑이

라 합니다요. 올봄 우리 기루에 들어왔는데 성이 박씨입니다요."

 

 대충 대답을 한 춘매는 떨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종사관의 눈치를 살폈

다. 종사관이 벗어 놓은 사대부의 옷 속에서 호패를 꺼내 살펴보았다. 함께 온

젊은 군사가 조서에 열심히 무언가 적고 있었다. 

  "정갑영? 추랑?"


 종사관은 혼자 중얼거리며 호패를 들여다보았다. 한양에서 강력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터라 이번 살인사건은 상부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할 터였다. 종사관과 젊은 군사가 조사를 모두 마치고 두 변사체를 포도청

으로 옮기도록 하고 태흥관을 떠났다.

 

  태흥관에서의 기생과 양반의 동반살인 사건은 삽시간에 한양의 인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었다. 좌포청에서 10여일 걸려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 졌고

그 조사결과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를 받은 조정의 형조에서는 이 사건의 전말이 새어 나갈까 쉬쉬하고 있

었다. 사건 당사자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였으며, 철저한 유교신봉 국가인

 조선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은 형조의 관리들을 경악

시켰다.

 

  사건의 발단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금(後金)의 태종은 스스로 황제

라 칭하고 국호도 청으로 고쳤으며, 조선이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하여

12월이 되자 중순경 15만 대군을 직접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

였다.

  선왕(先王) 광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명과 후금사이에서 견제와 협조

로 외교를 펼쳐왔다. 그러던 후금이 명을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군사와 군수물자의 수급을 지원 받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권좌에서 쫓겨나자 조선과의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었다.

 

 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김상헌,홍익한등 척화론자들의 득세 때문

이었다. 우유부단한 상감은 이들의 주장을 따라 청을 적대시 하고 멀리했다.

  조선의 장수 임경업은 의주(義州)의 백마산성에서 청군 선봉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간파한 청의 선봉장 마부태(馬夫太)가 이끄는 청군은 곧 바로

우회하여 한양으로 진격해왔다.

 

  13일이 지나서야 조정에서는 청의 침입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청군은 14일

지나 개성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해왔고 한양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임금

도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다가 이미 피난길이 청군에 의해 차단되어 세자와 백

관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였다. 12월 16일 청군은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한양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10년전 후금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을

 때도 오랑캐군사들은 한양성에 칩입하지 않고 황해도 황주에서 철군했던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감히 오랑캐가 한양성을 침범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정에 출사하여 판교(判校) 벼슬을 하던 던 정진경의 집안도 아무런 대비가

없다 졸지에 청군들의 한양 급습에 놀라 서둘러 피난 갈 채비를 하였지만

갈 곳이 없었다. 오랑캐 군사들이 한양성을 장악하였고 한양외곽으로 나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종로 육의전 근처에 살던 정진경은 목멱산(目覓山) 아래에 사는 고모댁이 종로

보다 안전하다고 판단되어 칠순이 다된 부모와 처자식과 노복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새벽이 훨씬 넘은 시각 정진경은 노부모와 가솔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초생달이 교교히 떠 있었지만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종로통을 감싸고 있었다.

사방에 오랑캐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했다. 진경의

가족은 3개조로 나누어 목멱산으로 움직였다.

  맨 앞에 젊은 남자종 두명으로 노부모를 모시게 하고 중간에 처, 박씨와

두 아들은 여자종 두 명과 건장한 남자종 덕칠이와 함께 이동하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맨 뒤에 남자종 한 명과 뒤를 따랐다. 거리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오랑캐 칼에 맞고 창에 찔려 죽은 한양백성들의 언 시체가 길가에 수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얼어죽은 것은 오랑캐들이 조선백성의 씨를

말리려 한 것 같았다.

 

  종로통은 대부분의 상점이 철시하였고 민가도 굳게 문이 닫혀 있거나 오랑캐

들의 방화로 불타거나 반쯤 타다만 형태여서 마치 도심 전체가 흉가를 방불케

했다. 간혹 젊은 여인들의 시체도 눈에 띄였는데 하나 같이 속고쟁이가 벗겨져

오랑캐들에게 강간을 당한 후 죽임을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짐승같은 놈들!"

  정진경은 이를 갈았다. 목멱산 가는 길목마다 한양의 무고한 백성들의 사체가

넘쳐 났다. 평소 같았으면 활기에 넘쳐있을 운종가와 광통교 주변도 사람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정진경의 가족들이 목멱산 입구에 막 당도 할 즈음

갑자기 호각소리가 들렸다.

 

  맨 앞서가는 노부모와 진경은 재 빨리 인근 폐허가 된 민가로 몸을 숨겼지만

처 박씨녀와 함께 있던 일행은 미쳐 몸을 숨길 시간도 없이 오랑캐의 포로가 되었

다. 그 와중에 두 아이들도 잽싸게 도망을 쳤고 진경의 처 박씨녀와 덕칠이와

중년의 여종 두 명이 포승줄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박씨녀 일행은 떼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진경과 노부모 일행은

숨을 죽이며 자신의 처와 종들이 잡혀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아아! 이 일을 어쩐다."

 정진경은 한탄하였다. 한양에서 내노라 할 미모를 지닌 처 박씨녀를 오랑캐놈

들이 그냥 내버려 둘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부모 역시 눈앞에서 잡혀

가는 며느리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포로가 된

정진경의 처 박씨녀 일행은 용산에 있는 청군의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동녘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다.

  10평 남짓한 검은 천막이 끝없이 설치되어 있고 천막 앞에 4-5명의 창을

든 오랑캐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박씨녀 일행은 조사를 받기 위해 다른

막사로 이동했다.

 

  막사안에는 변발을 한 30대 초반의 오랑캐군관과 한명과 세명의 부장들이

이미 포로로 잡혀 온 한양의 백성들을 취조 하고 있었으며 천민이 아닌 옷차

림을 한 것으로 보아 양반들과 중인(中人)들로 보였다.

  천민(賤民)이 아닌 경우 이들이 직접 신분을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

같았다. 포승줄에 꽁꽁 묶인 박씨녀는 소피가 마려웠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냥 앉아서 일을 봐야 할 판이었다. 박씨녀가 어쩔줄 몰라하며 이리저리 움직

이자 이를 눈치채 부관 하나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왜그러시오?"

  박씨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그 부관은 조선말을 썼다. 조선의

백성을 취조하기 위해 통역이 필요했을 터였다. 그래서 오랑캐중에서 조선

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이 막사에 배치된 것 같았다.

 

  박씨부인은 조선말씨에 그만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남산골 입구에서 청군들

에게 포로로 잡혀 이곳 용산 청군병영까지 오면서 죽음의 공포에 떨었고

쏼라 거리는 오랑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더욱 공포가 업습 했었기

때문이다.



 "저어……." 


  난생 처음 보는 변발을 한 오랑캐에게 소피 볼 장소를 물어보는 것도 사대

부가 며느리로서는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느낌으로 박씨 녀가 무엇을 요구

하는 지 알아차린 그 통역관이 포승줄을 풀어주고 박씨 녀에게 손가락으로

소피 볼 장소를 알려주었다.


 함께 잡혀온 여종 막녀와 언심이 그리고 덕칠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소피를 마친 박씨 녀는 젊은 군관 앞에 꿇어앉았다.


 "이름과 나이 사는 곳 그리고 남편의 직업과 자식들을 대시오. 우리

대청군은 당신네 조선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이곳까지 왔지만 당신네

왕이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적으로 간주하여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을 포로로

잡았으니 순순히 말해주기 바라오."
 통역관이 약간 서툰 조선말로 은근히 겁을 주었다.


 "어서 말하시오 !"
그 통역관이 군관 눈치를 보면서 다시 박씨 녀에게 물었다. 한 젊은 군관은

이 막사에 조사 받기 위해 박씨 녀가 들어 올 때부터 한시도 박씨 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박씨녀의 미모에 반한 것 같았다.


 이미 이곳에서 무사히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며 이미 나라님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상태고 한양의 백성들은 청군의 창칼에 어육이 되가는 판에

절개고 체신이고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포로가 된 이상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박씨 녀는 순순히 대답하기로 결심

했다.


  "박씨 녀라고 합니다. 올해로 22살이고 사는 곳은 종로 육의전 부근이며 남편은

당하관(堂下官)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다섯 살과 네 살 된

아들이 있는데 정근영 ,정근수라고 합니다."


  박씨 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 젊은 군관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통역에게 뭐라고 물었다. 아마 박씨 녀에 대하여 방금 말한 내용을 통역에게 묻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만면에 웃음 띠면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함께 포로가 된 막녀와 언심이 그리고 덕칠이한테도 똑같은 질문이 이어

졌지만 허름한 행색을 보아 박씨녀의 하인이라고 단정을 하였는지 대충대충 물어

보는 것 같았다. 군관의 지시로 박씨 녀는 하인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박씨녀는 만약 이들 과 헤어진다면 앞으로 벌어질지 모른 자신의 앞길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판단하고 박씨 녀는 즉시 통역관에게 눈물로 사정을

했다.


 "나으리 ! 저들을 소인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저들은 모두 나와 함께

생활해 온 사람들입니다, 부탁입니다, 저들을 함께 있도록 해주십시오."
 통역관은 변발을 한 고급 군관에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이내 안 된다고했다.

 

 박씨 녀는 다시 울면서 사정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인들과 헤어지면

안 될 일이었기에 박씨 녀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옥가락지를 뽑아 통역관에게

주면서 다시 하소연을 하였고, 그 군관은 박씨녀의 얼굴을 보더니, 한참 있다

그 통역관에게 말했다.



 "하오! 흔하오!"


 군관의 말 한마디에 덕칠이와 막녀 언심이와 함께 있도록 조치되었으며

조사를 마친 박씨 녀 일행은 조선의 포로가 수용된 있는 수많은 검정색

천막 중에 맨 동쪽 부분에 있는 곳으로 이동되었다. 덕칠이는 남자인 관계로

바로 옆 천막으로 옮겨갔다. 열 평 남짓한 천막 안에는 이삼십 대 한양에서 잡혀

온 십여 명의 여인이 초주검이 되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며칠 동안 세수도 못 한 것처럼 머리는 산발이며 얼굴이 상처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천막이라 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미약

했다. 무명헝겊 으로 만들어진 천막은 너무 얇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너풀

거리고 심하게 흔들렸다. 모포 하나 덮고 신음하는 아낙네들이 불쌍해 보였다.

막녀가 누워있는 처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 아프우?"
 그러나 그 처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신음소리와 행색으로 보아 상당히 지쳐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언심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처자는 돌아

눕더니 귀찮다는 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육시랄 년아 !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 둬."
 한마디 내뱉고 다시 돌아 누워버렸다. 박씨녀 일행이 멍하니 있자 옆에 누워 신음

소리를 내던 좀 젊어 보이는 처자가 약한 목소리로 대신 말을 걸어왔다.


 "이보시오, 어디서 잡혀 오셨는지 모르나 댁들도 참으로 딱하게 되었구려..."
 그녀의 얼굴과 걸치고 있는 옷차림새로 보아 양반집 규수처럼 보였다. 매우 지쳐

있는 모습인데 눈망울만은 살아서 반짝였다. 막녀가 이 처자가 말이 통하겠다

싶어 접근하여 말을 걸었다.


 "여기계신 아씨와 우리는 피난을 가다가 오늘 새벽 떼놈들에게 포로가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댁은 언제 여기에 잡혀 오셨우?"
 그 처자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세 명의 신참들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난, 사흘 전 이문동에서 잡혀 왔소. 아버님과 오라비는 떼놈들에게 죽임을 당하

셨고 나와 우리 어머니 둘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어제 돌아 가셨

어요."
 그러면서 젊은 처자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다가?"
 이번에는 곁에서 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씨 녀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린 사람이 아니에요. 밤만 되면 우린 저 떼놈들의 몸뚱이를 받아 내야 한답

니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낮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밥만 먹이고 내버려

둔답니다."
 박씨 녀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고 충격을 받았다.


  "아! 저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혈기가 왕성한 오랑캐 병졸들은 밤이면 포로로 잡혀 온 젊은 처자들을 자신

들의 숙소로 불러들여 집단으로 윤간(輪姦)을 했다. 고급군관들은 제법 미모가

뛰어 난 젊은 처자들을 불러들여 밤마다 육체를 탐했다.

 

  그들에게 조선의 처자들은 하찮은 전리품이었다. 순간 박씨녀는 당장

오늘 밤 자신도 옆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처자와 같은 신세가 되리라고 짐작

하고 이제 모든 정황이 파악이 된 듯 박씨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좀전에 자신을 취조하던 그 청군 고급군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 누워

신음하고 있는 젊은 처자들 모두는 밤이면 벌어지는 오랑캐들의 육욕(肉慾)의

먹이감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치를 떨었다. 막사 앞에는 창검을 든 청군이 지키고

있어 밖을 내다 볼 수도 없었다.

 

  해가 중천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점심 무렵 쯤 된 듯 했다. 막사 밖에서는 말

울음소리 오랑캐 군사들이 떠드는 소리 간간히 조선백성들의 비명소리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했다.

  박씨녀는 갑자기 엄습해 오는 잠을 참을 수 없어 하품을 하자 곁에서 지켜

보던 하인 막녀가 아씨가 안 되 보였던지 잠시 눈을 붙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새벽 인시(寅時)경 청나라 병사들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 한 잠도

자질 못했다.

 

  새벽에 집에서 피난 나올 때 입었던 노란색 수란치마 여기저기에 어디서

묻었는지 핏자욱으로 얼룩져 있고 저고리도 황토로 물들어 있었다. 악몽에 시달

리던 박씨녀는 그만 잠이 깨었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지만 밖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저녁 때 같았다. 막사 안은

잡혀 온 한양의 처자들이 신음소리와 숨소리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막녀와 언심이도 단잠에서 일어나더니 박씨녀의 안부가 걱정되었던지 말없이

쳐다보았다.


 "아씨! 시장하시죠? 어디 불편한데 없으세요?"

 언심이가 살며시 물어왔다.


  "응, 난 괜찮은데 너희들이 고생이 많구나."

  박씨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왔다. 평소 같았으면 따듯한 방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읽으며 어린 자식들과 환담으로 행복한

호사를 보내고 있을 시간이었다.

 

  몇 일 사이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운명이 찾아 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는 일념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막사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 추위를 녹이기 위해 경계를 서는 오랑캐 병사

들이 중간중간 피워 놓은 모닥불빛이 천막 틈새로 언듯 언듯 비쳤다.

 

 갑자기 오랑캐 병사들이 막사앞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막사안의 모든

처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앉아 숨을 죽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안해하고 있었

다. 오랑캐병사 두명이 나무로 된 큰 물통 같은 것을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밥을 가지고 온 것이다. 아무리 포로지만 인간이고 밤에 자신들의 음욕을

해소시켜 줄 처자들이기에 먹이지 않고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포로에게 가장 좋은 음식을 배급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배급이라고 해봤자 한 사람당 잡곡이 섞인 차가운 주먹밥 같은 것 한덩이에

멀건 소금국 한 통이 고작이었다. 오랑캐 병사는 마치 자신들이 큰 은전이라도

베푼는 것처럼 거만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뭐라고 쏼라거리며 히죽히죽 웃으며

처자들의 엉덩이도 차고 아무곳이나 주물러댔지만 심신이 피곤해진 처자들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오랑캐병사가 막사 밖으로 나가자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서로 자신의

찬밥덩이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후 옆 사람의 밥까지 빼앗아 먹기 위해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아귀같은 모습을 바라보던 박씨녀는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어쩌다 이런 일을 봐야 하는 걸까? 조정에서는 무얼 하였기에 무고한 백성

들이 저 짐승같은 오랑캐의 손에 노예 취급을 받아 구차한 삶을 연명해야 한단

말인가? 서방님과 가족들은 무사한지..."


  박씨녀는 볼 위로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먹던 주먹밥을 내려놓자 언심

이와 막녀도 밥먹기를 멈추고 박씨녀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씨! 맛은 없지만 드셔야 해요. 어떻게든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시려면 드셔

야 해요."

 막녀가 소금국을 떠 박씨녀에게 건네주자 억지로 먹는 시늉을 했다. 이문동에서

잡혀왔다는 처자가 박씨녀에게 다가왔다.


 "저어, 보아하니 대갓집 아씨 같으신데, 준비를 하셔야 할꺼예요. 이제 시간이

되가는 것 같은데..."

 박씨녀는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곁에서 눈을 껌벅

거리던 언심이가 무슨 이야기냐고 묻자 그 처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밤마다 우리는 오랑캐놈들의 노리개가 된답니다. 아씨는 자색이 고와서 오늘

밤 그냥 넘기시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라고

아뢴거에요."

 

  말을 마친 처자는 아직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무슨 뜻인줄 안 막녀와 언심이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막녀와

언심이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종이었다. 그 처자의 말에 박씨녀

일행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분명 여자들의 분냄새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거나 여자를 알지 못했던 오랑캐

병사들이 조선의 여자포로들을 그냥 놔둘리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다시 막사 밖이 시끄러워 지기 시작했다. 오랑캐 병사 두명이 들어

오더니 옆에 누워있던 젊은 처자 네명을 어디론가 데리고 나갔다. 매가 병아리를

낚아 채가듯 말이 필요 없었다. 그 병사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그냥

말없이 따라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잠시후 두명의 다른 오랑캐 병사가 들어오더니 또다른 처자 4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막사안에는 박씨녀 일행과 이문에서 잡혀온 처자 그리고 아직

긴 댕기머리를 한 젊은 처녀 한 명, 모두 다섯명이 남아 잠시후 다가 올 자신들의

운명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그러나 두병사가 나간뒤로 한참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 막사안은 다시 긴장과 고요가 엄습해 왔다.

  매 순간 순간 목을 옥죄어오는 긴장감에 박씨녀는 점점 두려움에 휩싸여 갔다.

그러나 두 하인들 앞에서 체신머리없이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씨녀는

 골몰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 어차피 저 짐승같은 놈들의 성의 노리개감에서 탈피할 수 는 없을 것

이다. 나는 시집을 가서 출산까지 한 몸이지만, 이 두 여자들은 오늘밤 어찌

시간을 보낼 것인지..., 그래 미리 이야기를 해주어야 겠어'

  박씨녀는 남자를 모르는 두 여종이 성폭행을 당한후 그 충격으로 혹시 자진

이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녀야! 언심아! 너희들 내 이야기 잘 들어야 해. 우리가 여자로 태어났기에

오늘밤은 어쩌면 오랑캐놈들에게 몸을 더럽힐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한

일이 있어도 목숨을 버리려 하거나 다른 마음먹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여자의

정조를 목숨처럼 생각해 온 우리 조선여인들은 외간남정네들에게 절개를 잃게

되면 치욕스럽게 여겨왔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저들은 이 조선 땅의

백성들 씨를 말리려고 하는 자들이기에 나와 너희들이 무슨 치욕을 받더라도

꼭 살아남아야 한다. 꼭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니?"

 

  막녀와 언심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박씨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세명의 오랑캐 병사가 막사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명은 낮에

박씨일행을 심문하던 통역관이었다. 박씨녀는 직감으로 그가 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낮에 조사 받을 때 변발을 한 젊은 오랑캐군관은 통역관과 귀속말로 무엇

인가 이야기하며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았기에 대충은 그 젊은 군관이 자신

에게 관심을 표명했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그 통역관이 박씨녀에게 다가오더니

공손히 입을 뗐다.

  "박소저! 우리 군관께서 소저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그 분은 청(淸) 황실과 통하는 전도가 유망한 분이시고 공부도 많이 하신 고급

군관 이십니다. 소저를 보고싶어 하시니 가십시다."

 

  이 상황에서 거절은 당연히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고 따라 나서자니 두려

움이 앞섰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박씨녀는 막녀와 언심이에게 좀전에 자신이

당부한 사항을 명심하란 말을 하고 일어나 통역관을 따라나섰다.

  낮에 조사를 받던 군영을 돌아 북쪽으로 한참을 더 걸었다. 간밤 피난길을

나섰을 때 보았던 초생달 홀로 하늘 높이 떠서 전쟁에 신음하는 조선백성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 처량해 보였다. 낮에 눈이 내렸는지 검은 막사 지붕이 온통

하얗다. 통역관과 박씨녀는 말없이 걸었다. 멀리서 말 우는 소리이외에는 고요

하여 병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막해 보였다. 이곳 용산 병영은 거대한 포로

수용소였다. 

 

  한양의 용산은 청태종과 마부태가 이끄는 선봉주력부대가 상감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항복을 강요하는 동안 한양성과 주변에서 잡혀 온

조선백성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거대한 임시 병영이 설치된 곳이었다. 수백의

임시막사가 좌우로 끝없이 늘어져 있는데 거의가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을

수용해 놓은 곳이었다. 통역관이 제법 규모가 큰 군막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박소저! 다른 마음을 먹으면 소저의 생명을 보장 할 수 없음을 명심하시오.

자, 어서 들어가보시오."


  통역관이 막사 입구 문을 열어주었다. 박씨녀가 주저하며 머뭇거리자. 통역

관이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하였다. 계속 주저하자 이번에는 큰 소리로 어서

들어 갈 것을 종용하였다.

 

  '이들도 사람이거늘 차마 나를 죽이기야 할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한 박씨녀는 헛기침을 한번하고 막사안으로 들어갔다.

막사안에 들어서자 창을 들고 보초를 서는 오랑캐병사 두명이 있었고 그들이

다시 문을 열어주자 내실이 나타났다.

  내실은 화려한 오랑캐식 침상과 탁자 그리고 나랏님이 피난을 간 대궐에서

약탈했음직한 대형 도자기 화병이 두 개 놓여있었다. 옆에 창과 검이 장식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으며 바닥은 양모로 짠 화려한 붉은 색상의 바닥재가

깔려 있어 이곳에서 기거하는 군관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그 군관이 무엇인가 열심히 서류를 보다가 박씨녀가 들어가자

일어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낮에 입던 군복대신 오랑캐전통복장을 하고 머리

에는 검은 비단모자를 썼는데 자세히 보니 상당히 잘 생긴 귀골풍의 젊은이

였다.

  그 역시 조선말을 모르고 박씨녀 또한 오랑캐말을 모르는 지라 두사람은 잠시

서있기만 했다. 이춘연이 붓으로 종이위에 '李春淵, 二十五歲(이춘연, 이십오세)'

이라고 써보였다.

 

  그리고 박씨녀에게 붓을 건네며 이름을 써보라는 시늉짖을 했다. 박씨녀는

 '朴氏 , 二十二歲(박씨 이십이세)'라고 써서 이춘연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춘연이 씨익 웃으며 박씨녀에게 다가와 의자를 내주며 앉으라는 손짖을

했다.

  그리고 박씨녀에게 책을 건네주었는데 당시(唐詩)집이었다. 이백과 백거이

그리고 두목지의 시가 적혀 있었다. 박씨녀는 명문가의 외동딸로 태어나 사서

삼경등을 공부하였고 요즘은 한창 한양 시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난설헌(蘭雪

軒) 허초희(許楚姬) 시를 즐겨 읽으며 27살에 생을 마친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춘연이 건네준 당시집의 내용은 박씨녀가 익히 즐겨 읽던 익히 잘 알고 있던

시들이었다. 젊은 병사가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미 박씨녀가 오면 들이기

위해 준비한 듯 했다.

  이춘연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붓으로 간단한 글자를 써 가며 의사를 전달

하려 하니 더욱 답답해 했다. 이춘연이 보초병에게 뭐라고 하자 잠시후 그 통역

관이 들어왔다. 군관이 통역관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다시 박씨녀에게 이춘연의

 뜻을 전했다.


 "군관께서 박소저가 마음에 드신 답니다. 사양치 말고 자신의 뜻에 따라 달라고

하십니다."

 "......"

 통역관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군관께서 몹시 외로우시답니다. 그래서 박소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으

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박소저의 학문을 보시고 싶으시답니다."

 

 통역관이 말을 마치자, 지필묵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막사안을 들어 올 때

만해도 두려웠지만 이춘연의 부드러운 얼굴과 미소 그리고 시집을 보자 마음이 안정

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조선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조선 여인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씨녀는 붓을 들어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