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8. 12. 7. 23:10

 









 

 

                    

 

 

 

 

 

 

             엑스X(8)

 

 

                                                                                                                                          - 여강 최재효

 

 


 이손 놔요. 난 작은 애 방에 가서 잘 테니 당신 혼자 이방에서 주무세요.
 애들, 할머니 집에 갔어. 아무도 없는 방에 가서 뭘 한단 말이야?


 , 아이들이 친할머니 집에 갔다고?
 왜 얘들을 할머니 집에 보낸 거죠?


 왜 보내다니? 오늘이 주말이고 할머니가 아이들 보고 싶다고 해서
보냈지.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 오늘밤 나에게 또 무슨 해괴망측한 짓을
하려고 하는

거죠?


 순간 나는 남편의 의중을 알고 침대를 보았다. 침대 위에 수갑과 가죽채찍

그리고 흑인남성의 그것을 모조한 시커먼 딜도(Dildo)가 놓여 있었다. 침대 모서

리에는 무비 카메라가 삼각대에 고정되어 빨간 신호불빛이 반짝거리며 주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초에도 남편은 나를 강제로 수갑을 채우고 변태적 행위를 하며 비디오카메

라에 담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출국하면서 외국생활에서 심심할 때 나를 생각하며

보겠다고 했다. 그날의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도 남편과 나는 외식을 하고 들어와 집에서 다시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

야기로 서로의 관심사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긴 시간을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남편은 느닷없이 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설명을 하며, 이상한 제의를 하였다. 나는

일단 호기심이 일어 승낙했다. 마침 울 방학 중이라 두 아이들은 외삼촌네로 놀러가

고 집에 없었다. 남편은 나의 누드를 찍겠다면서 옷을 벗기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라

요구했다.


 나는 너무 부끄럽고 가슴이 떨려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편은 나에

게 애원하며 안대(眼帶)를 착용토록하더니 이상한 포즈를 만들게 하고 디지털 카메

라 셔터를 눌러댔다. 두세 시간동안 나는 강제로 포르노 배우가 돼야 했다. 나는 그

날의 충격으로 여러 날 동안 가슴이 벌렁거려 일을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촬영한 사

진을 자신만 아는 외국 사이트에 올려놓고 나에게 자랑스러운 듯 보여주었다.    


 싫어요. 난 당신하고 잠자기 싫어요. 이손 놔요.

 여보, 왜 그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예뻐하는 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렇게 나를 예뻐한다면 나 조용히 자게 놔둬요. 제발.



 당신은 내거야. 주인인 남편이 안아주겠다는데 뭐 잘못되었어? 제발 내 말
 좀 들

. , 여보? 내가 이렇게 애원하잖아.
 당신은 도대체 나를 뭐로 알고 이러는 거죠?
 뭐로 알다니? 당신은 내 예쁜 마누라잖아?


 마누라가 아니라 홍등가에서 몸 파는 창녀로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다 안다고요.

제발 이손 놔요. 아이들이 있든 없든 난 혼자 숙면을 취하고 싶다고요.
 남편은 나의 저항에 당황했는지 태도가 갑자기 변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남편은

눈이 벌겋게 상기되어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지금 어디서 뭣하고 들어 온 거야? 늦게 들어온 주제에 웬 말이 그리 많은

거야? 네가 어디서 어떤 놈하고 무슨 짓거리를 하고 왔는지 네 몸의주인인 내가 검

사를 해봐야 겠어.



 남편은 나를 침대로 집어던지고 막무가내로 나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남편은 리모

컨으로 비디오카메라를 작동시키고 순식간에 내 두 손에 수갑을 웠다. 술에 만취한

나는 남편의 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 이게 무슨꼴이란 말인가? 도대체 부부의 정의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이성지

(二姓之合)이라했거늘,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인격체가 만나 심신이 일치되어

가정을 꾸미고 이세(二世)를 낳아 가문을 잇고 사회에 공헌하는 신성한 주체이거늘

어느 한쪽이 삐뚤어진 성격으로 인하여 한쪽이 핍박을 받아야 한다면 부부의 의미

가 이미 사라진 것 아닌가?


 나는 아무리 발버둥 치며 저항했지만 남편은 회심의미소까지 지어가며
거대한 딜

도를 들고 예민한 부의를 자극하며 해괴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제발, 여보 나 좀 살려줘요. 제발.
 시끄러워. 네가 어떤 놈이랑 배꼽을 맞추고 왔는지 모르지만 난 너의
가증스러운

행동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여보,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산사에 다녀오다 마음이 심란해 술 한 잔
했을 뿐

이라고요. 여보, 제발 이러지 말아요.


 입 다물어. 네 몸을 검사해야겠어.
 남편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주며 나의 이곳저곳을 지분
거리며

깨물기도 핥기도 하며 채찍을 휘둘러댔다


 찰싹-, 찰-
 남편은 나은 둔부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여보, 제발 이러지 말아요. , 난 이런 해괴한 짓이 죽기보다 싫어요.
제발 이 수

갑 좀 풀어줘요. 여보.



 네가 나를 무시했어. 나를 너무 우습게 봤는데 천만에 너는 이승에 있는
 내 명

령이 없이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돼. 알았어?
 여보,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남편은 눈빛은 마치 저승에서 온 사자(使者)의 눈빛처럼 파랗게 빛났다. 나는

비명을 질러가며 제발 그만 두라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서너 시간 동안 나를 학대

하며 자신의 이상한 취향을 만끽했다. 자신의 가학적 취향에 흥미를 잃은 남편은

마지막으로 내 몸속에 뜨거운 욕정을 분출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남편을

죽이고 싶도록 밉고 분노를 느꼈지만 거실로 나와 독한 알코올로 삭여야 했다.                                         

  

 남편은 다시 해외로 떠나갔다. 남편은 떠나가면서 만약 자신의 의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당장이라도 달려와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성 발언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내가 공항까지남편을 배웅하지 않는다고 시어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닥달하였다. 만사가 귀찮았다. 남편도 아이들도 기성이도

심지어 남편에게 강력하게 대항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나 자신도 싫었다.


 남편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전화기와 휴대폰을 모두 꺼놓고 일주일 동안 집안에

파묻혀 두문불출했다. 그 사이에 기성이와 미진이 그리고 지인들로부터 수백 통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매일 독한 술 한 잔이라도 마셔야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

를 깨달을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키고 문자 하나하나 확인해 았다


 [정미, 어디 아픈 거야? 왜 아무 답이 없어? 정말로 아무 일 없는 거지?

사랑해. 나보다 더 당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해 - 기성]
 [정미야, 왜 전하가 안 되니? 무슨 일 있는 거야? 이 메시지 보면 얼른
답장 좀

해라. - 미진]


 [정미야, 나 동창회 총무야. 내일 오후 6시 명동 **반점에서 모임이 있어
얼굴

좀 보자]
 [, 정미야. 에미다. 어째 통화가 안 되는 겨? 답답해 죽겠다. 빨리
전화 좀

하거라.]
 [정미, 사랑해. 마음이 아파. 당신 목소리를 단 한번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어.

벌써 통화 안 된지 일주일이 넘었어. 빨리 전화 좀 줘요 - 기성]


 [정미야, 너 어떻게 된 거니? 혹시 병원에라도 입원하고 있는 거야? , 정말로

궁금해 죽겠어. - 미진]
 [정미씨, 이 문자 받고 다음날까지 아무 연락 없으면 당신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으로 간주하고 집으로 찾아갈 겁니다. 제발 연락 좀 줘요. 사랑해요- 기성]


 다행히 기성이 문자를 보낸 시각은 어제 늦은 밤이었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성이 나를 찾아 집으로 올 수도 있을 시간이 었다.

나의 헝클어진 몰골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초췌해진 내 모습에 울음부터 나왔다.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경대 앞에 앉았다. 먼저 기성이에게 문자를

띄워야 했다.


 [기성씨, 나 집에 잘 있어요. 오지마세요. 오후 5시 정각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봐

. 사랑해요. - 정미]
 내가 문자를 보내자마자 기성이에게서 답신이 왔다.


 [, 다행입니다. 난 당신이 어찌되었는지 알았어요. 지난 일주일은 나에게

악몽의 시간이었어요. 알았어요. 있다가 교보문고에서 봐요. - 기성]


 [알았어요. 기성씨, 사랑해요. - 정미]
 일주일 내내 거의 식사도 거른 채 알코올에 의존해 연명해 온 까칠한 여인이

거울 속에 동공이 풀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미용실로 달려갔다.


 어머, 사모님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마담이 반색을 하며 아양을 떨었다.
  전에 한 세팅파머가 풀어진 거 같아요. 클래식 롱 파머로 해주시고요
파머가 끝

나면 화장도 부탁드려요.



 마담의 손에 내 긴 머리가 다듬어졌다. 이제 남편은 남편이고 나는 나야 할 필

성을 나는 최근 며칠사이에 절실하게 느껴야 했다. 우수에 찬 내 얼굴에 나 자신도

짜증이 났다. 의자에 앉아 입술을 좌우상하로 움직이며 웃는 연습을 해보았다.


 그래, 난 지금까지 노예였어. 난 해방 돼야 해. 나 자신이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수

밖에 없어. 이제부터 나는 나, 남편은 남편이야. 나는 남편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여자가 아니라고 난 남편의 력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속으로 다짐 또 다짐하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만약에 남

편이 나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나의 존재를 귀중하게 여긴다면 남편을 따라 지옥아

니라 그보다 더한 곳에라도 갈 수 있었다. 포르노 배우가 아니라 그보다 더 야한

포즈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무시해가며 한낱 자신의 장신구 정도로 여긴다면 나는 더 이상 억지

결혼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너 얼마나 잘났는지 두고 보자.  


 약간 앉아있는 자세를 틀면 엉덩이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일주일 전 남편의

가죽 채찍이 할퀸 자국이었다. 아파도 차마 병원에 가지 못하고 약국에서 안티프라

민과 간단한 연고정도로 상처를 다스려야 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나의 이 같은

고충을 상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얼추 거의 다 나았지만 그날의 악몽을 생각하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단장을 하였다. 날씨가 초여름이어서 약간 푸른빛이 도는 불투명

한 흰색으로 된 투피스를 입어보았다. 미용실 마담이 직접 한 화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업소에 나가는 인 같았다. 아이샤도우

가 흰색 투피스에 비해 너무 진한 것 같아 부러쉬로 다시 엷게 한 다음 보라색 립스

틱을 지우고 빨간색으로 바라보았다.

 

 손톱 위에 하얗게 페인트를 덧칠하고 점점이 까만 점을 만들어 올려 놓고 맨 뒷 부

분에 붉은 색으로 살짝 반달을 그려 넣었다. 클래식 롱 파마와 갸름한 얼굴의 상태

로 보았을 때 붉은 색이 어울릴 것 같았다.


 이렇게 단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성이? 아니면 서울 시내를 배회하는 뭍 남

자들의 시선? 아니면 나 자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 자신도 아니고 기성이 때문도 아니며
서울시

내를 배회하는 뭍 남자들을 위하여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가슴 속 깊이 쌓

여있는 울분을 토로하고 싶은 심정에서 나 자신을 진짜 술집 작부나 녀가 되어보

고 싶은 유혹이 나를 지금처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외국의 환락가에서 바걸(Bar Girl)들을 끌어안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랜

다는 그럴 듯한 미명하에 욕정을 뿜어내고 있을 남편에 대한 반감에서 야기되었

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빨간 핸드백과 빨간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아직도 초여름의 태양이 대지를 달

구고 있었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부채를 치거나 땀을 닦느

라 손에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아저씨,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주세요.
 “…….
 아저씨,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주시라고요.
 , 네네 네네…….


 저어, 손님은 TV에서 뵌 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택시기사는

 나에게 수작을 걸면서 흘낏흘낏 백미러로 나를 훔쳐보았다. 서울의 남자들은

모두가 이성에 대하여 강한 정복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한 듯 택시기사도

연신 나를 쳐다보면 찬사를 늘어놓느라 손과 발 그리고 눈이 분주했다. 하마터면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칠 뻔도 하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

보았다.


 서울의 도심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멀리 아스팔트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그 속에서 마천루와 대형 빌딩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마

치 사막에서 볼 수 있다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는 바의 욕망,

배신, 질투, 욕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택시 안에서 저 신기루의 일부가 되어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교보문고에 도착했을 때 기성이 어디서 구했

는지 하늘색에하얀 꽃문양이 그려진 예쁜 양산을 펼쳐들고 나에게로 뛰어왔다.


 어머, 기성씨. 벌써 오셨나봐요?
 아냐. 금방 왔어.


 고마워요. 양산까지 다 준비해 주고. 나는 미처 준비도 못했는데.
 공주마마를 모시는데 그럼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

 공주라는 말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얼마 만에 웃어보는 웃음인지
웃으면서

그만 눈물이 나올 뻔 했다.


 그런데 정미 공주님, 오늘 선보러 가시나요?
 어머, 아줌마가 무슨 선을 봐요?


 선은 꼭 아가씨만 보남?
 시집가는 아가씨가 선을 봐야지 아줌씨들이 선을 보면 되나요?



 피이~ , 그건 공주마마께서 요즘 세태를 잘 몰라서 그래. 요즘, 미혼 기혼
 가릴

거 없이 얼마나 자주 선을 보는지 알아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기혼이 왜 선을 보는지요?


 이제는 선본다는 것을 꼭 장가들거나 시집가기 전에 미혼의 당사자 끼리 만나서

서로의 외모, 주변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절차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자유로운 성개방 시대에 맞물려 남녀노소 누구나가 선을 보는 대상이 되었지.

왜 요즘 애인없는 기혼 남녀는 국보급에 해당한다고 하잖아.
 그럼, 전 국보급이네요. 기성씨는 애인있어요?


 ? 있지.
 있어요? 어디 있어요? 몇 살 정도 되었고요? 키도 크고 예쁘겠네요?
 그럼, 당연하지.


 어머나, 부럽고 질투심 나요. 그럼 그 애인불러 즐기세요. 난 다시 집에 갈래요.
 내가 돌아서는 시늉을 하자 놀란 기성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애인이 바로 내 앞에 있는데. 공주마마, 어디를 가신다고요?
 치이~, 정말?


 그대가 나보다 더 소중한 애인이야. 서울에서 난 당신처럼 예쁜 여인을

보지 못했어. TV나 영화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모두 가짜라고 할 수 있지.
 가짜?


 그럼, 가짜야.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화장을 해온 탓에 피부는 대부분 망가져있

. 정미처럼 순백의 화장기 없는 미인은 드물어. 상당수 여자 연예인들 세수시켜

놓으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몰라본다고. 예를 들어 요즘 잘나간다는 가수 U를 세

수시켜 놓고 명동을 활보하라고 하면 아무도 몰라볼?


 그렇게 유명한 연예인을 왜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상당수 많은 연예인들은 가짜라니까.
 저도 오늘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왔는데요?


 그대는 내가 척 보니까 아이라인과 아이샤도우 그리고 립스틱만 한 것 같은데.

그게 훨씬 돋보여. 화장품이 뭐야. 독극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독극물을 얼굴

에 덕지덕지 바르고 다니니 얼굴이 금방 썩지. 그런데 정미는 본래 피부가 곱고 하

얀데다가 피부 관리를 잘 한 탓에 입술이나 눈 어느 한 부분만 강조하여도 튀어

보여. 본바탕이 있잖아.



 암튼 고마워요. 언제 제 피부에 대하여 그 정도까지 파악
하셨어요? 정말 기성씨

눈썰미는 매섭네요.


 나 오늘 바빠서 점심도 못했는데 우리 어디 가서 식사나 할까?
 , 어디 공원에라도 가고 싶었는데…….


 밥 먹고 가면 되지 뭐?
 그래요 그럼.
 고마워. 밥 먹고 멋진 데 데리고 갈게.


 멋진 데가 어딘데요?
 ,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치이~, , 나 밥 먹고 싶지 않아요.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나는 먹지도 않은 점심을 먹었다고 말하고 기성이의 팔짱을 끼고 가까운 한정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앉자마자 기성이 는 갈비탕을 주문하고 나에게 모기소리

만하게 속삭였다.


 , 이혼했어. 와이프랑. 어제 숙려기간 끝나서 법원에서 합의이혼 판결이 났거든.
 , 정말로요?

 기성이 이혼하였다는 말에 마음이 우울해졌다.


 . 정말로…….
 기성이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시키더니 마치 물마시듯

벌컥거리며 마셨다.


 무슨 소주를 그렇게 마셔요? 안주도 없이 속 버리면 어쩌려고요?
 속이 시원해서 그래.
 그럼, 나도 주세요.


 ? 소주가 쓴데?
 괜찮아요. 처음 마시는 거 아닌데요 뭐.
 , 그래 그럼.
 기성이 소주 한 병을 주문하였다.


 그럼, 기성씨 아내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뭐가 어떻게 돼? 그 여자는 그 여자 갈대로 가고 나는 나 갈대로 가면 되는

거지. 결혼한 뒤로 장만했던 집 두 채 중 한 채는 그 여자에게 위자료로 주었어.

 시가 10억 원은 훨씬 넘을 거야. 강남 대치동에 있는 거니까.


 잘하셨어요. 요즘 남자들이 영악해서 미리 재산 다 빼돌리고 이혼하면서도

자기 자식까지 낳아 준 아내에게 위자료 한 푼 안 주는 파렴치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그러고 보니 정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알고 있네 뭐?
 제가 정말로 바본 줄 아셨나봐요?
 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줄 알았지. 집에 있는 여자들은 그럼 다 바보가 되는

건가요?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것 보다…….
 기성이와 나는 소주 세병을 마시고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식사를 하는
기성을

보니 10일 전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오랜 기간 머리 아팠던 고민 거리가 하루

아침에 해결되다보니 살 것 같은 기분이 든 모양이다. 나는 그런 기성이 은근히

부러웠다.


 ,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계속 남편의 욕정의 분풀이 대상으로 릴없이

살아가야 하나? 기성이처럼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자니 아이들이 불쌍하고 ,

냥 살자니 나 자신이 점점 비참해지고어찌해야 하나? 나도 이혼하고 차라리 기성

이와 다시 시작해? 그러면 동창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아마도 못된 년, 미친년,

신 나간 년 하면서 나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쏘며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풀려하겠

.


 공주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 한잔 받으시라고요. 오늘 그리 예쁘게 치장

하고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주마마.
 기성씨, 나 놀리는 거예요?


 아냐? 놀리긴 그대처럼 세련되고 예쁜 미시가 네 곁에 있으니 내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


 정말로요?
 그럼.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기성이 한남동 방향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기성이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기성이 내 손을 잡

아 주는 순간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눈물도 닦지 못하고 나는 목을 시트

뒤로 젖히고 꼼작하지 않았다. 내가 훌쩍거리거나 눈물을 닦는다면 기성이의 신경

건드릴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주르르륵 흘러 내렸다.


 , 나쁜 년.
 나는 20년 전 미영이의 행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때 기성이의

편지를 나에게 제대로 전해주었다면 남편의 무시무시한 성폭력은 그저 영화나

삼류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알고 있던지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쯤으로 치부

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내 인생이 점점 꼬여가는 것이 모두 미영이에

게 책임이 있다고 돌리고 싶었다. 기성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무엇을 생각하는 지 

창 밖을 내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정미야, 지난 일주간 네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나 매일 매일 술로 살았어.

 내가 무엇을 잘못해 네가 나에게서 영영 떠나 앞으로는 못 보는 줄 알고 나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어. 네가 없으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줄 알게

되었어. 사회적 잣대로 나를 재본다면 내가 죽일 놈이지. 이십 년 전 사랑을 들먹

이며 배우자가 있는 첫사랑의 여인을 찾아 다시 사랑을 불태우고 싶어 하는

나를 사회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아니, 정신 나간 놈이라고 돌팔매질을 하겠지.
 

 기성씨, 뭐해요?
 나는 기성이 모르게 눈물을 닦고 기성이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제야 기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어.

 정말로요?


 정말. 그런데 정미, 왜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어? 아까 택시 탈 때만 해도 안 그랬

는데? 운거야?
 아뇨. 눈에 티가 들어갔나봐요.


 택시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카페에 멈추었다. 나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정원을 걷자고 했다. 팔짱을 끼자 먼저보다

기성이 팔에 힘을 주었다.


 정미야,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왜 내 전화를 안 받은 거야?
 네에, 있었어요. 그러나 차마 당신에게 말 할 수없어요. 이건 내 업보이겠지요.

 나 혼자 가슴앓이 해야 하는 이승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업보일 테죠.
 이무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고향에 엄마가 편찮으시다 고해서. 남편이랑 다녀왔어요.

 어머니 간호하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전화도 못해서요.
 그런 일이 있었어? 지금은 어머니 건강이 좀 어떠셔?
 많이 좋아지셨어요남편은 먼저 올라와 외국으로 떠났고 나는 어제 올라

왔어요.


 , 그랬구나.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기성씨, 더워요. 우리 안으로 들어가요.
 , 그러지.


  멀리 인천쪽 빌딩숲 속으로 아스라이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석양이

 우리의 만남을 축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오세요.
 우리 저쪽으로 가요.
 내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정미는 늘 창가를 좋아하지. 나도 그런데.
 기성씨, 오늘도 칵테일 만들어 주실거에요?

 

 아니, 오늘은 그냥 주문해서 마시자고.
 왜요? 난 기성씨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이 맛있는데.
 주문을 내가 만든 것처럼 할게. 이전에도 이집을 몇 번 왔었는데 이집 여주인이

칵테일도 잘 만들어주거든.


 기성씨, 이집 단골인가봐요?
 가끔 혼자서 무엇을 생각할 일이 있으면 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혼자 술을
마시

곤 했었어.


 그랬어요? 너무 센티멘털할 거 같아요. 혹시 여인네들이 합석하자고 안 해요?

 아직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웨이츄레스가 오자 기성이 여주인을 잠시 보자고 했다.


  여주인은 왜 불러요? 그냥 주문하면 되잖아요?
 이집 여주인이 내 취향을 잘 알거든. 그래서 직접 레시피를 알려주고 주문
하려고.
 여주인은 기성씨가 부르면 긴장하겠어요. 오늘은 또 무슨 종류의 술을 주문할지

몰라서요.


 그럴 수도 있겠지.
 어머나, 차 사장님.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내가 기성이와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육십 초반의 여인이 메뉴판과 메모지를 들고

 다가왔다.


 사장님, 그간 별일 없으셨지요? 낮에도 손님이 많은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들 난리인데요?
 고마워요. 다 차 사장님 같은 좋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전 라이위스키(Rye whiskey) 말고 버번을 써서 스위트 베르뭇과 비터를 좀 짙게

 해서 맨하탄 하나 만들어 주시고요, 이 분에게는 라이트럼 2온스 넣어 블루하와이

 한잔 부탁할게요.
 네에 고맙습니다. 차 사장님.


 블루하와이란 술도 있어요?
 응 오늘처럼 더운 날 마시면 괜찮을 거야.
 나 기성씨 따라다니다 술꾼 되겠어요.


 우리 술문화가 대개 소주, 맥주, 양주 또 탁주나 전통주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그래. 이제는 칵테일이 대중 음주문화에 정착해야하는데......
 금방 웨이츄레스가 맨하탄과 블루하와이를 간단한 스낵과 함께 내왔다.


 어머나, 예뻐라. 이렇게 가을 하늘처럼 파란 술이 다 있네요? 마시기 너무

아까워요.
 긴 필스너 잔에 껍질이 붙어있는 파인애플 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그 위에 빨간

체리가 앙증맞게 올려져 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시원해 보였다.


 , 우리 건배하지?
 네에.
 정미야, 뭐라고 하면서 건배할까?
 탁월한 언변의 기성씨가 해보세요.


 그럴까?
 네에 해보세요.


 나의 첫사랑 정미와 기성이의 아름다운 해후를 위하여. 그리고 앞으로

이승에서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서로 마음변치 않고 옛날처럼 사랑하고 위해

주는 아름다운 인연을 위하여!


 나는 기성이의 건배사를 듣고 마음이 뭉클하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블루하와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자 기성이 얼른 손수건을

나에게 건넸다. 카페 안에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바보같이 울기는…….

 나는 목이 메어서 더는 칵테일을 마시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화장실

에서 나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엉엉 소리 내어 통곡하고 말았다. 남편에게

상처받은 가슴이 기성이의 따스한 배려에 그만 참지 못하고 참아왔던 서러움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렇게 가슴속에 응어리를 모두 토해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안정이 되면서 머리도 맑아진 느낌이었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기성이는 언제 시켰는지 양주 한 병을 시켜서 스트

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술인데 라벨을 보니 좀 전에 맨하탄 칵테일을

주문할 때 이야기 했던 버번위스키인 짐빔(Jimbeam) 같았다. 그는 창밖을 내려다

보며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다가가면 그의 명상에 방해가 될

같아 살며시 발작소리를 죽여 가며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 이제 좀 괜찮아진 거야?
 네에. 미안해요. 쓸데없이 눈물을 보여서요.


 누구든 울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실컷 울어야 마음이 가벼워져. 안 그러면

가슴에 응어리로 뭉쳐져서 나중에 큰 병이 될 수도 있어. 어머니 때문에 그런거


?



 네에.
 금방 좋아지시겠지.
 고마워요.


 미안해. 내가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기성씨는 나에게 충분히 도움을 주었어요.
 그래? 난 정미에게 전혀 도움 준 일이 없는데…….

 기성씨, 나도 그 술 주세요. 저 밍밍한 칵테일은 마시겠어요.

 안 돼. 먼저처럼 술에 취해 우리 서로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어는 지도 모르면

 어떻게 하려고?


 그날처럼 또 그렇게 된다고 하여도 마시고 싶어요. 몇 잔만 마실게요.
 그럼, 딱 세잔만 마셔야 해. 알았지?


 네에.
 그럼, 이번엔 정미가 간단한 건배사를 멋지게 해보지?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순간 이 후부터 당신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내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생

각하며 이승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마음변치 않을

거예요. 이제부터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당신만을 의지할거예요. 오늘밤

나는 그대와 한마음이 되고 싶답니다. 나와 당신의 새로운 사랑을 위하여.


 “…….
 기성이는 나의 말에 말없이 잔만 부딪혔다. 그리고 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입에 물

었다.


 정미야, 미안하다. 지금 너에게 큰 시련이 있다는 거 네 눈빛을 보고 알았어. 내가

그동안 눈치가 없었구나.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기성이는 멀리 한강 위를 나는 새를 바라보며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참으로 이상하죠? 사람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꼭 만나게 된다어느 시인

의 이야기가 요즘처럼 내 가슴에 사무치도록 다가오니 말이예요. 불과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나는 차기성이란 이름 석 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쑥 내 앞

에 나타났으니 말이예요. 한때는 그리움이었고 원망의 대상이었던 당신이 이렇게

이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방금 정미가 말했듯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는 건 어쩜 전생에서 맺어진 인연의 끈이 현생에서도 유효하기 때문 일거야.

나는 요즘 너를 만나고부터 나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너

무 강해서 그랬을 거라고 아련하나마 추측하고 있어. 아니, 나와 맺어져야 할 사람

이 타인의 팔베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못 견디게 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타인의 아내가 된 너를 이제 나에게 와서 나와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하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고. 너를 만나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슬퍼.

너하고 헤어져서 집에 돌아가면 텅 빈 집, 썰렁한 침대, 귀신이 살 것 같은 집안에

두려운 생각마저 들곤 해.


 기성은 담배 한가치 피우는 동안 위스키 잔을 너댓번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역시 기성이와 엇비슷하게 잔을 비웠다. 기성이 피워대는 담배가 솜사탕 같았다.

난 얼른 핸드백을 열어 먼저 등산 갔다 올 때 피우다 남은 말보로를 꺼내 물었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기성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미야, 담배는 몸에 해로워. 피우지마. 차라리 술을 마셔. 담배는 안 돼. 나야 이

제 인이 박혔으니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잠시의 괴로움으로 육신까지 괴롭게 하지

. ? 제발 부탁할게.
 알았어요. 그럼 나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때가지 마실 테니 말리지 말아요.
 , 알았어.


  나는 연거푸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넉 잔을 비웠다. 아침 점심도
거른 탓에

나는 금방 취기가 올랐다. 이를 악물고 나는 미친 여자처럼 위스키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짐빔 한 병이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우리는 서로 상처 입은 곳을 어루만지는 방법을 술에서 찾고 있었다. 술로서

 아픈 곳을 서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술과 원수진 사람들처럼 술을 몸속에

집어넣으며 잠시라도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다. 학원에서 돌아와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을 작은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어른들 싸움에 애매하게 아이

들이 희생되는 것 같아 두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늘 보류시켜야 했다.


 기성씨.
 ?


 , 나 이혼할 거예요.
 이혼?


 네에.
 ? 아저씨가 정미에게 잘 해주시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이혼을 해?
 

 이유는 묻지마세요.
 안 돼. 절대 이혼하지 마.


 나는 아이들이 없어서 그 나마 천만다행이었지만 정미는 두 아이가 있잖아.
아직

고등학생이라며? 앞으로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할 아이들인데.
 이유는 묻지마세요. 기성씨를 만나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 이혼하려는 게 아니

예요. 말 못할 사정은 누구에게 다 있어요.


 그래도. 이혼은 안 돼. 미진이가 나와 그대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아마 지금쯤 아는 동창 애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만약 정미가 이혼했다고 하면

정미의 가정을 깬 사람으로 내가 지목될 거야. 정미의 소중한 가정이 깨지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아.


 내가 이혼하는 이유는 당신과 절대 관련이 없어요.
 아니죠. 당신이 나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나는 이혼하는 거예요.
 정미야, 안 돼. 동창아이들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이혼만큼은 하지 마. 진심이야.


 기성씨, 나에게도 비밀은 있어야 하잖아요. 남편과 나는 결혼 초기부터 여러모로 

맞지않았어요. 아이들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살았어요. 이제 아이들은 내가

애 아빠와 헤어진다하여도 내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거예요."


 "그럼, 남편으로부터 독립하려고 공부를 했던 거야?
 어쩌면 그럴거예요.
 어쩌면?


 아아, 내가, 내가 정미를 괜히 찾은 거 같다. 내가 죄를 짓는 거 같어. 내가 처음

의도한 것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었어.
 기성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지고 괴로워하였다.


 기성씨, 미안해요. 모두가 나의 부덕의 소치에요.
 나와 기성이는 서로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마침 바브라스트라이샌드의 우먼 인 러브(Woman in Love) 홀 안에 울려 퍼졌다.


 Life is a moment in space / When the dream is gone
 It's a lonelier place / I kiss the morning goodbye


 밤이 깊어가자 30대 이상의 커플들이 홀 안을 꽉 메웠다. 음악과 좋은 분위기는

 술 맛을 더욱 좋게 하였다. 처음에는 약간 역한 맛 때문에 마시기 어려웠으나

언더락스 잔에 각 얼음을 두 덩어리 넣고 위스키와 콜라를 섞어 마시니 훨씬 잘 넘

어갔다. 다시 또 한 병의 버번이 배달되었다. 내가 미친 듯 술을 마셔대니까 기성이

걱정이 되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와 앉았다.


 기성이 내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손이 내 손보다 더 뜨거웠다. 나는 살며시 기성의

어깨에 기대어 서울의 한강 저 건너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88올림픽도로와 강변도

로 위로 수많은 차들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

자 기성이 살짝 내 뺨에 키스를 해왔다.


 기성씨, 사랑해요. 왜 내가 당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거죠?

 나는 정말로 이 현상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

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특히 인간들의 탐욕과 질투, 시기는 비극을 낳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잉태하기도 하죠. 이십 년 전 일만 생각하면 나는 죽고 싶은 심정이예

.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미야, 이제 지난 간일 생각하면 무엇 하니? 이제 비록 우리 부부가 아닐지

라도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면 되잖아.


 그러다가 누구하나 아무런 말도 없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면 한쪽은 어떻게

해요?
 그럴 리가 있어? 이렇게 당신이 내 곁에 있는데. 나는 당신 곁에 있고.

 참았던 설음이 복받쳐 올랐다.



 울긴? 바보같이…….
 기성이 손수건을 꺼내 내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내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자 기성이는 가만히 내가 울음을 그칠 때

까지 기다려 주었다.


 기성씨, , 나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아이들은 어쩌고.


 아이들에게 메모 써놓고 왔어요. 메모대로 하고 있을거예요. 가끔 갑자기 어디

갈 일이 생기면 그렇게 했어요. 아이들 다 커서 다 알아서 해요. 걱정 마세요.
 “…….


 우리는 짐빔 4병을 비우고 카페에서 나왔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나는 기성이에게 무작정 택시를 타자고 했다. 택시에 탄 나는 기사에게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자고 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