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X(5)
엑스(5)
- 여강 최재효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장롱 깊이 잠자고 있던 초등학교
앨범을 꺼내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나는 수줍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기성이도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수가 담겨 있는 듯 했다.
만약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기성이와 함께 다녔다면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기성이와 수많은 날을 함께하면서 사진
한 장 남겨 놓지 못한 것이 늘 미련으로 남아 있었다. 기성이의 나의 사진을
휴대폰으로 촬영하여 보관함에 넣었다.
먼저는 기성이가 원해서 내가 그를 만났지만 이제는 내가 그를 원했다. 아스
피린으로 두통을 잠재우고 간신히 눈 좀 붙인 뒤 나는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
원장은 단골인 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요즘 나의 근황을 물어왔지만 나는
엉뚱한 답변을 하고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머리 스타일과 나이가 안 들어
보이게 하는 헤어스타일을 묻자 원장은 탤런트 K의 올백 헤어스타일을 권했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나니 내 마음에도 좀 야하다 싶었다. 집에 돌아와 여러 가지
옷을 입어 보았다.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거울을 보았다. 힙이 강조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봐도 좀 섹시한 걸? 후후 후훗. 기성이가 어떤 시선을 줄지 궁금한데.’
나는 마치 선을 보러 나가는 아가씨가 된 기분이 들었다. 기성이가 현재 어떤
상태여도 좋았다. 나와의 해후를 위하여 일부러 이혼을 하여도 좋았고, 나에게
호감을 사기 위하여 거짓으로 이혼하였다고 해도 좋았다. 시간이 오늘처럼
지루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후가 되면서 나는 10분 간격으로 시계를 확인
했다. 오로지 첫사랑을 만나러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잠시 내 뇌리에서 사라진 셈이다.
새로 구입한 속옷 세트를 입고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뒤 흰색 재킷을 걸쳤다.
빨간색 핸드백은 든 나는 마치 룸살롱에 나가는 야화(夜花)같았다. 입술을
진한 분홍색으로 칠하고 엷은 푸른색이 은은히 드러나는 선글라스를 썼다.
그래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괜히 거실을 빙빙 돌면서 워킹연습을 해 보았
다. 모델도 아닌 내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대여!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도 나 때문이라면 좋겠습니다.
나는 미영이 뇌리 속에 잠자고 있던 나의 시를 읊조리며 커피를 마셨다. 기성
이는 20년 전 나에게 보낸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미영이 입을
통해 20년 만에 들은 시는 나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기성이의 시처럼 그가
나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한 사실이 무엇 보다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오늘이라도 그가 나에게 청혼을 한다면 나는 내가 한 남자의 아내이며 두 아이의
엄마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의 청혼에 승낙할 것 같았다. 20년 전의 청혼을 20년
이 지나 중년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허락을 한다는 것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할 일이
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나 자신만의 비논리적인 해답을 얻고 고개를 끄덕여 보기
도 했다.
‘그래, 못할 것도 없지.’
나 스스로 그런 결론을 내려놓고 나는 내 가슴 어딘가에 숨어 꿈틀대고 있는
또 다른 욕망의 씨앗을 보았다. 만약 그 씨앗이 단비에 흠뻑 젖는다면 지난 간 20
년의 세월은 까맣게 잊혀져 마치 간밤의 악몽 쯤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와 가족을 위해 개미처럼 일하고 있을 남편의 구릿빛 얼굴과 두 아
이들 모습에 그만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20년이 지난 이제 와서 그를 만나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간신히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20년
동안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 온 나의 역사가 내 얼굴에 고스란히
아로 새겨져 있었다.
동창애들은 내가 전혀 늙지않았다고 침을 튀겨가며 찬사를 보내오지만 나 자신은
내가 제일 잘 아는 법이었다. 20년 전 보다 둔해진 사회적 감각, 처진 볼과 눈두덩,
두툼해진 입술, 펑퍼짐한 엉덩이, 굵어진 팔뚝, 살이쪄 둥글어진 얼굴, 그 어느 부위
에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 자신 없어 진 것을 보충하려고 피부 관리실을 열심히 드나들었고, 헬스클럽이
다 수영장이다 테니스다, 가리지 않고 배웠지만 야박한 세월은 나의 그런 노력들에
대하여 아랑곳 하지 않고 점점 자신감을 잃게 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만나지 말자고 하면 그의 가슴에
또 상처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계는 오후 4시를 가
리키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택시를 타도 종로까지 30분은 족히 걸
릴 거리였다.
‘그래, 이와 마음먹었으니 만나보자. 만나서 20년 전 오해를 풀어야지. 안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늘 죄인으로 살아가야 할 거야. 그래, 만나보자. 내가 호랑이나 사
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내 첫사랑을 만나는 일인데.’
내가 집을 막 나설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기성이에게서 온 문자메시지 였다.
지금 막 회사를 나와 택시를 타고 종로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가슴이 다시 뛰
기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자꾸만 백미러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른 손거울을 꺼내 보
았다. 내 얼굴에 아무것도 묻은 것이 없는데 기사는 자꾸만 나를 훔쳐보았다.
“기사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 아닙니다.”
“그럼 왜?”
“아, 사모님 혹시 탤런트 한혜숙씨 동생 아닌가? 해서요? 제가 한혜숙씨 열렬한
팬이거든요. 그런데 아까 택시 타실 때 전 한혜숙씨가 타시는 줄 알았어요.”
“네에? 제가 한혜숙씨를 닮았어요?”
택시 기사덕분에 약간 우울했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렸다. 5월 중순 늦은 서울
오후는 초여름 날씨 같았다. 파릇했던 가로수가 어느새 짙푸른 색으로 변했고 사람
들은 벌써 반팔차림으로 다니고 있었다. 다시 휴대전화가 심하게 진동했다.
기성이 우리가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으니, 교보문고 입구에서 보자는 문자였다.
택시에 내린 나는 기성이가 문학 소년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
하고 시집 한 권을 사서 선물하기로 했다.
베스트셀러라고 한 시집을 몇 권 보았으나 모두 판에 박은 듯 시시콜콜한 사랑
타령 뿐이었다. 그러다가 C시인의 ‘흔들리는 것은 사랑을 한다’라는 시집을 구입
하였다. 기성 시인들과 차별화를 둔 고차원적인 인생과 자연 그리고 사랑을 묘사한
시가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거의 5시에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시집을 사들고 나오다 뒷모습이 기성
이와 비슷한 남자를 발견하였다. 얼른 그 남자 곁으로 다가보니 기성이가 틀림없었
다. 여점원에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어머, 기성씨.”
“아, 정미씨.”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시집을 다 사시고.”
“그러고 보니 그대도?”
기성은 나를 데리고 가까운 레스토랑을 찾았다. 레스토랑은 10대 아이들로 꽉차
있는데 대부분 여자애들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있었다. 나는 20년 만에 보는
낯익은 모습이지만 어디가 모르게 나 자신에게 어색하게 다가왔다. 나는 기성이
에게 차라리 삼겹살집이나 순두부 백반 집 같은 수수한 곳을 가자고 하였다.
그는 내 제의에 흔쾌하게 대답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기성이는 택시기사에게 인사동으로 가자고 하였다. 인사동 역시 가정주부로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잃어버린 추억의 장소였다. 대학교 첫 미팅을 인사동에서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남학생은 K대 영문과 학생이었다. 샌님처럼 생긴
남학생과 밤늦도록 철학이 어떻고 문학이 어떻고 하며 술에 취해 세상을 논하던
추억이 마치 어제일 처럼 생각났다. 서울 토박이인 그 남학생도 어쩌면 이 서울
하늘아래 어디쯤 둥지를 틀고 있을 것이다.
내부가 전통 한옥 스타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주점으로 기성이 나를 안내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 종업원이 우리를 한방으로 안내했다. 벽에는 조선시대
요염한 기생의 그림이 걸려 있고 전통 문양이 아로새겨진 문갑과 화초장이 놓여
있는데 상당히 기품이 있어 보였다. 기성이 전통주인 안동소주와 간단한 안주
거리를 주문하였다. 주문하자마자 술과 안주가 나왔다.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기성이 건넨 시집은 괴테의 명시(名詩) 모음집이었다. 기성은 이것저것 골라 보았
으나 딱히 눈에 드는 시집이 별로 없었다고 하였다.
“이건 제가 기성씨에게 드리는 시집이에요. 그리고 이 시집을 건네기 전에 제가
최근에 암기한 명시가 한편 있어요. 들어보실래요?”
“그래요? 누구의 시 인데요. 어서 낭송해 봐요. 차암, 우선 술 한 잔 받아요.”
기성은 명시라는 말에 상당히 궁금해 하는 눈치다. 나는 일부러 약간 뜸을 들였
다. 기성은 ‘왜, 빨리 안 읊고 뭐해?’하는 눈빛이다. 녹차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 입을 열었다.
그대여!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도 나 때문이라면 좋겠습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사연과 저 초승달이 매양 슬픈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저 별과 달이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년은 별바라기가 되거나 혹은 달바라기 되어
밤을 지새우다 바위가 되어도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은 그대를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랍니다.
비록 세월이 흘러 한 점 티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대 이름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내가 20년 전 나에게 보낸 자신의 연시를 낭송하자 기성이는 숨소리를 죽여
가며 눈을 지그시 감고 술잔을 들었다. 내가 중간 정도 낭송하자 기성이의 두 눈
이 휘둥그레지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후반부는 나도 모르게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자 기성이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시 낭송을 끝내자 기성이는 손수건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와
기성이 사이에 침묵이 마치 1000년 세월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물렀다.
“정미씨, 어떻게 된 거에요? 편지를 한 통도 받은 적이 없다면서?”
“…….”
나는 누가 한대 때리면 그 것을 빌미삼아 금방이라도 대성통곡할 것같은
심정이었다. 기성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음이
진정될 때 까지 기다렸다.
“기성씨, 미안해요. 최근에 나는 어쩌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큰일
을 겪고 있어요.”
‘전환점?’
기성이는 전환점이라는 말에 입안에 있던 술 한 모금을 그만 꿀꺽하고 넘겨버
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리 말 놔요. 서로 존칭 쓰는 거 어색해요.”
“정미, 어서 말해봐 그 전환점이란 의미가 뭔데?”
나는 지나 간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기성이에게 모두 털어 놓았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도 기성이는 한탄을 하며 술만 마셔댔다. 20년 전
어머니가 미영이 편에 나에게 전해주라고 했던 이야기부터 최근에 서울 K시장
근처에서 미영이를 만났던 사실까지 모두 털어 놓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서 기성이는 계속 눈물을 찍어냈다. 연거푸 마셔댄 술로 기성이는 약간 취한 듯
보였다.
“이십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얼마나 원망했
는지 아니? 그래서 지난번 미진이에게 부탁해 너를 만나보려 한 거야. 미진이에게
대충 네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너를 보면 막 욕을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막상 너를 보니까 이십년 전 일이 며칠 전 일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런데, 나 때문에 이혼했다는 이야기는 뭐야?”
“......”
“나 때문에 현재 부인과 이혼했다며?”
“미안해, 그건 내가 꾸며낸 거야. 실은 아내와 이혼 일보 직전이야. 곧 정리가 될거야.”
“그럼, 나에게 거짓말을?”
“정미야, 미, 미안해. 너를 보자 나는 이십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진심이야
믿어줘.”
기성이는 20년 전 대학 들어가자마자 건강상 문제로 휴학해야 했던 사실과 열 번
이상 편지를 보내도 나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자 절망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고 싶었
다고 했다. 나에 대한 반발 심리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자식도 낳
지 않고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해왔다고 했다.
“아니, 아이도 없다니. 왜?”
“나, 늦게 결혼했어. 사업에 매달리다보니 여자에게 관심 둘 시간이 없었어. 그러
다 어느 날, 나 자신을 뒤돌아보니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 서둘러 결혼을 하
다보니 내 이상형의 여자가 아니었어. 그렇다고 한번 한 결혼을 물릴 수도 없고해서
10년 가까이 결혼생활 아닌 결혼생활을 해왔지. 나나 그 여자, 서로에게 불행한 일
이지.
나는 그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면서도 늘 너를 생각해왔어. 이 하늘 아래 어디
쯤엔가 네가 살고 있을거라고 늘 먼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지. 그런데, 그런데 어
느날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미치겠더라고. 동창애들 모임에도 열심히 나가보았지
만 너만 보이지 않아 가슴 한쪽이 텅빈 느낌이 들었었어. 그래서 수소문 해보니
미진이가 너하고 전화연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거야. 결국 이렇게 너를 만나
게 되었고.”
갑자기 기성이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전자를 들어 기성이 잔에
술을 채웠다. 나나 기성이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20
년전 어그러진 인연에 기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영이라는 존재만
없었더라면 나는 기성의 아내가 되어있을 수도 있었다.
대개가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않는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반대의 입장이다.
첫사랑하는 동안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어 신비감이 없어 지거나 서로의
기대가 일시에 해소되어 더 이상 만나야 할 필요성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대개의 첫 사랑이 실패하기 쉽다. 여자는 고갱이가 되어야 한다. 벗겨도
벗겨도 함부로 속을 드러내지 않은 배추속 같아야 남자들은 지속적으로
여자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어린 소녀들은 알지 못해 첫사랑과 이어지지
못하고 만다.
나의 경우는 내가 대학입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첫사랑이 어그러졌고
미영이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伏兵)을 만나 더욱 꼬였다. 그 꼬였던 사랑을
이제 다시 펴본다는 것이 다소 무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기성이가 늦게 결혼하고 아이도 없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쓰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빨리
돌가가고 싶었다.
“사업은 잘돼?”
“응, 요즘 경기가 전반적으로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편이야. 우리
지난 가슴 아픈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오해가 다 풀렸으니 술이나 마시자고.”
“난, 너에게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은데…….”
나는 기성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농리 궁금했다.
“그래? 그럼 천천히 이야기해봐.”
“나, 그때 정말로 너를 사랑했었어.”
나는 자존감도 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야?”
기성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천진난만한 어리 아이
의 맑은 눈동자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
“아냐, 그냥해본 소리야.”
‘아냐, 지금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다만, 지금의 내 주변
상황이 그럴수 없어 마음이 아플 뿐이지.’
기성이 잠시 주저하였다.
“그럼, 20년전으로 몸과 마음을 되돌려볼까?”
나는 술이 취한 것인지 한 마디 던지고 나서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럼 돌려봐.”
기성이는 방금전 까지 우울했던 기분을 전환하였는지 박장대소하며 내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었다. 그런 기성이를 보고있노라니 점점 옛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
다. 주전자에 다시 술이 가득 담겨 들어왔다.
방에 앉아 있으면 자꾸 술만 마실 것 같아 기성이에게 강바람을 쐬자고 제의 하자
흔쾌히 동조했다. 택시를 타고 서울역 앞을 지나고 용산을 지나 한강변 도로를 달
렸다. 늦은 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수부지에 나와 산책을 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도 고수부지로 내려가 걷기로 했다. 강바람이 상큼하게 불어왔다. 내가 살짝
팔짱을 끼자 기성이 기다렸다는 듯 팔에 힘을 주며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정미야, 몇 년 만이지? 이렇게 둘이 팔짱끼고 걷는 게 말이야?”
“이십년만이지. 마치 어제 같은데 정말로 세월이 너무 빨라. 내 인생에 있어서 지
나 20년은 암흑기야.”
“왜? 그렇게 생각해?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열심히 살았잖아. 현모양처
로......”
“아이는 결혼하면 다 낳잖아. 그러나 지난 이십년 동안 난 맹물 같은 남편과
두 아이들만 보고 살아왔어. 현모양처, 참으로 좋은 말이지. 옛날에 남자들이
여자들을 집안에 옭아매려고 만들어낸 사탕바림 말이지. 그 현모양처란 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집안에 가두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여인들이 얼
마나 많아?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 그 틀 속에서 나 또한
우리들 어머니처럼 집안에만 있다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어.
왜 여자들은 결혼을 해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결혼하면 반드시 꼭 아이들을
생산해내고 그 아이들이 뛰어 다닐 때까지 그림자가 돼야 하나. 난 결혼하고
줄곧 이런 의심에 시달려왔어. 여자는 결혼하는 순간 누에가 되지. 석잠 정도 잔
누에가 되어 나름대로 가정이란 집을 꾸미며 그 안에 안주하려는 인위적인 아니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지. 요즘에 들어서야 여자들이 자각을
하게 되었지만. 나도 누에가 되어 오랜 세월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고.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삶에 신물이나 약간 늦은 감은 있지만 나 넉잠을 자고
번데기가 되어 이제 우화(羽化)되어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고 싶고. 아마 더
늦으면 아주 퇴화되어 우화하지 못하는 번데기로 남아 영원히 갇혀 있을 고치를
만들고 말거야.”
기성이는 가만히 걸으면서 정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미의 젖가슴이
살짝 팔뚝에 닿을 때 마다 기성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현모양처에 그렇게 깊은 여인들의 상처가 녹아 있는 줄 몰랐는데 앞으로는
함부로 현모양처를 들먹이지 말아야겠어. 정미야, 내 말에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해.”
“아니야. 미안해 할 거 없어.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야. 이십 년 전 중단
되었던 꿈을 다시 잇고 있는 중이라고. 그대가 나타나서.”
“그 꿈이 오래갔으면 좋겠네.”
“아니야, 가능한 한 빨리 마쳤으면 아주 빨리.”
“그게 무슨 뜻이야? 가능한 한 빨리라니.”
“남자들은 연애를 하다가도 막상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를 하나의
부속물로 취급하려하지. 나 또한 그런 남성우월주의에 깊이 오염된 한 남자의
부속물로 오랜 세월 길들여졌고.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다시 여자로 태어난다면
결혼은 절대하지 않을 거야. 아니지 결혼은 하되 공평무사한 결혼을 하고 싶어.
여자를 단순히 집안에 화초로 생각하지 않는 남자하고. 아니면 내가 남자역할
을 하고 남자에게 여자들이 하는 집안일을 시키던지 말이야.”
“여기 그런 남자 있잖아. 이미 이십 년 전 그대에게 검증받았잖아..”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우리는 크게 웃어보았다. 강바람이 차가웠다. 내가
춥다고 판단했는지 기성이는 상의를 벗어 나에게 입혀주었다. 강위로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 다녔다. 나는 밤에도 새들이 활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남편을 생각해 보았다. 물론 가정을 위하고 가족을 누구보다 끔찍이 여기는
남자지만 잔재미는 없는 밍밍한 물같은 사람이다. 그를 두고 뭐라고 탓하거나
흠을 잡는다면 누구든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이다. 그는 빵만 많이 물어다 주면
남자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빵을 위하여 세상을 사는 시대는 아니다. 당연히 빵은 충분히
있어야 하겠지만 빵보다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세대처럼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무조건 자식을 위한 삶을 산다면
지금이 조선시대와 무에 다를 게 있을까.
여자는 그저 여자여야 한다고 위험한 사상을 지닌 남자에 속하는 남편이 언젠가
부터 내 마음속에서 차차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귀국해 가지는 변태적
섹스는 나에게 자신이 남자이며 나는 그의 종물(從物)이라는 강한 메시지와 함께
단순히 의무감에 사로잡힌 몸부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섹스란, 남녀의 가치를 한층 더 상승시켜주고 서로의 감성과 이성에 의존해 치러
지는 신성한 행위여야 한다. 서둘러 자신만의 배설욕구를 채우고 상대방의 배려
가 전혀 없는 섹스는 동물의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가뭄에 콩 나듯 한 남편과의 이상한 섹스에 나는 이제 성(性)이란 무미하고 건조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지의 성애(性愛)를 생각해
보지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황망히 얼굴을 붉히고 했다.
“정미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니?”
“응? 아냐 아무것도.”
“무언가 굉장한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
나는 기성이에게 나의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강바람이
다시 한 번 훅하고 불어왔다. 기성이 얼른 나를 감싸 안았다.
“춥지?”
“아니. 참을 만 해.”
“정미야, 우리 저기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자. 아무래도 밖에 더 있다가는 감기 걸
릴 것 같아.”
나는 마지못해 따라가는 척 기성이의 팔을 꽉 잡았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었다. 집에 전화를 하니 큰 아이가 방금 학원에서 돌아와 둘째와 간식을 먹고 있
는 중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0여 평의 자그마한 카페에 젊은 남녀 서너 쌍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얼른 강이 내다보이는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강바람을 쐬고 들어왔
더니 어느 정도 술이 깬 듯했다. 기성이 역시 택시타고 올 때보다 정신이 맑아졌다
고 했다. 기성이 메모지에 무엇을 적더니 웨이터에게 주며 메모내용을 준비하여 달
라고 하자 웨이터는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성이 능숙한 솜씨로 셰이커에 보드카 1온스를 붓고 드림 드 카시스와 피치
브랜디, 파인애플 주스, 크랜베리 주스를 넣고 흔들어 스템레스 필스너 잔에 따랐
다. 붉은 색 술이 잔에 가득 찼다. 앙증맞은 노란색 우산에 체리 한 개를 관통시켜
레몬 슬라이스에 꽂고 잔 가장자리에 장식하고 초록색 스트로를 꽂아 나에게
건넸다.
“어머나 예뻐라. 기성씨 이게 무슨 술이에요?”
“응, 섹스 온더 비치(Sex on the beach)란 칵테일이야.”
“어머, 그런 술도 다 있어요?”
기성이는 칵테일 이름을 알려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묘한 칵테일
이름과 정열적인 색의 술잔이 두 사람의 가슴을 뛰게 했다. 기성은 순식간에
싱가폴슬링이란 칵테일을 만들더니 정미에게 건배를 청했다. 술 맛이 달콤하면
서도 쌉쌀한 것이 내 취향에 딱 맞았다. 내가 금방 잔을 비우자 기성이 다시 한
잔을 만들어 주었다.
“아니, 정미야? 취하면 어떻게 하려고? 칵테일이라고 얕봤다가 큰일 난다고?”
“이까짓 칵테일 몇 잔에 내가 떨어진다면 내 존심에 먹칠을 하는 거지.”
“그래? 그럼 마음껏 마셔 내가 이번엔 다른 걸로 만들어 줄게.”
“뭔데?”
“지켜만봐봐.”
이번에는 기성이 잔에 각 얼음을 두 개 넣고 보드카를 부은 다음 레몬주스와
오렌지 주스를 적당히 믹싱한 뒤 그레나딘 시럽을 따르자 천천히 잔 아래로 흘러
들어가면서 마치 노을처럼 변했다. 그 다음 체리 한 개를 살며시 띄우자 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어머나, 이런 술도 다 있네?”
“응, 이건 보드카선셋(Vodka sunset)이라고 하는 칵테일이야 일몰을 형상화 한
칵테일이지. 자, 이것도 마셔봐.”
“그런데, 기성씨. 어떻게 이런 칵테일을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거야? 혹시
부업으로 바텐더를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바텐더? 맞아 집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지.”
기성이 만들어 주는 칵테일을 겁 없이 마시던 정미는 자신도 모르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독한 전통주에 이번에는 바다 건너온 양주까지 정미는 마치 걸신
들린 여자처럼 기성이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칵테일을 마셔댔다.
“오늘 맛본 칵테일 중에 나는 그거 뭐였지? 제일 먼저 마신 섹스 온더…….”
“응, 섹스 온더 비치?”
“맞아 그게 제일 맛이 있는 거 같은데…….”
“정미야, 이제 그만 마셔. 취한 거 같은데. 집에 어떻게 가려고 그래?”
“집에 못가면 그대하고 밤 새우면 되지 뭐? 나 해변에서 그거 하는 칵테일도
마셨잖아.”
“…….”
“왜요? 겁나요? 내가 어떻게 할까봐?”
“그, 그게 아니고. 집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걱정 마셔요. 우리 아이들 엄마가 하룻밤 안 들어온다고 불안해 할 아이들
아니니까요.”
“…….”
“나 오늘 밤 그대 만나면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사랑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나나 그대나 배우자가 있으니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도 몸과 마음이 일치
가 안 되니 어쩌죠? 나 원래 불량기가 있었나 봐요. 나도 모르는 못된 기질
이…….”
“정미야,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 취한 거 같은데.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
“싫어요. 20년 만에 만나서 이렇게 시시하게 헤어진다면 난 울어버릴 거 같
아요. 그러니 가라고 하지 말아요.”
“…….”
“기성씨, 여자가 뭐라고 생각해요?”
“응? 뭐라니? 여자가 그냥 여자지.”
“초등학교 수준의 명답이네요.”
“그럼, 정미는 여자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여자는 남자이기도 하고 그냥 여자이기도 해요.”
“여자가 남자라? 나도 그럼 여자?”
“그래요. 남자. 여자는 자궁과 난소(卵巢)를 몸속에 지니고 있지요. 자궁이
세상을 창조하는 신이라고요. 세상의 모든 암컷에게 자궁과 난소가 없다면
이 우주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겠죠.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이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다고 봐요. 성경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 빼내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결국 여자의 근원은 남자라고해도 과언은 아니예요.
남자가 이상한 물건 달고 엉성한 초벌구이라면 여자는 초벌구이에서 예쁜
문양과 다양한 기능을 업그레이드 한 재벌구이 과정을 거친 섬세한 도자기라
고 할 수 있어요.
여자는 남자를 만들어 내고 여자도 만들어 내면서 세상을 만들어 내지요.
그러니 여자를 여자라고 아니 단지 애만 낳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못된 남자와
여자는 모두 뇌수술을 받아야 해요. 여자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는 거예요. 여자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등 떠밀리듯 한 남자의 소유물이
되어 평생을 몸과 마음을 바쳐가며 헌신 봉사하는 노예가 아니란 뜻이에요.
지금도 이 나라에는 전통적인 관습이니 뭐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함부로 혀를 놀려가며 여자들을 억압하려드는 남자들이 많아요. 이 사회의 구조
부터 모든 것이 남자를 위하여 있어요. 정치, 경제, 역사, 법, 모든 인간이 만들어
낸 창조물에는 철저히 남자 위주로 되어 있다고요. 신들도 역시 성차별을 하였
어요.
왜 이브가 아닌 아담이 먼저 탄생해야 했을까요? 이브 먼저 탄생되고 다음에
이브의 몸에서 아담이 태어나야 논리상 생태학적으로 맞는 말 인가요? 어떻게 아
담의 몸에 난소도 없고 자궁도 없는데 단지 갈비뼈만으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거지요? 전 창세기에 여자를 비하하는 내용에 긍정할 수 없어요.
태초부터 어긋난 인류 역사로 인하여 여자들은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어요. 연애시절에서 신혼시절로 바뀌면 당연히 남자들은 여자를 자신의
부속품쯤으로 여기잖아요. 왜 여자는 남자들 뒤에서 뒷바라지나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공자와 맹자 선생이 살아있다면 철저히
따지고 싶어요.
지금 이 서울 땅에도 여자는 약한 것, 남자에게 얽매여 살아야 하는 존재, 남자
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남편의 눈치를 보아가며 스스로
가정의 노예로 전락되어 사는 멍청이들이 수두록 하지요. 나도 그 부류 중 한 사
람이었고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나름대로 뜻을 가지고 가정이라는 창틀을 깨려고
하니까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같은 여자인 시어머니까지 결사반대를 하더
군요. 가만히 집에 있으며 국으로 남편이 물어다 주는 먹이나 먹고 있으면서
아이들이나 키우라고 말이에요. 난, 나에 대한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어요.
평생 목석같은 한 남자에게 발목이 잡혀 유리성(琉璃城)같은 집안에서 살아
가야만 하는 바보인가 하는 자문에 늘 답변을 얻지 못해 답답했어요.
그러나 그대를 만나기전부터 나는 결심했던 것이 있어요.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거에요. 난 사육되는 돼지가 아니거든요. 나는 한 남자
에게 몸을 바치는 창녀가 아니라고요. 나는 시간이 많아 쓸데없이 남의
흉이나 보는 그런 멍청하고 영혼없는 유한마담이 아니라고요. 앞으로 내 앞길
을 가로 막는 자는 그 누구든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예요. 나는 그동안 틈틈이
학원 다니며 공부해온 디자인 일에 전념할거라구요.
이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에요. 시집가기 전까지는 철저히 요조숙녀로 살
것을 요구하면서 시집가면 남편에게 모든 것을 주라고 하죠. 그래야 깨가 쏟아
지고 집안이 편하다고 하지요. 지금까지 나도 그런 생활을 해 왔지만 이제는 나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여자들은 가정에서 남편에게서 그리고 성(性)에서 해
방되야해요. 그렇다고 모든 가정주부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라는
뜻은 아니예요. 남자들과 평등해야 한다는 거죠.
농경사회나 수렵시대처럼 남자들의 완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아니잖아요.
이제는 부계사회(父系社會)에서 모계사회(母系社會)로 변하고 있어요. 핵가족
화와 더불어 더욱 빠른 속도로 모계사회로 전이되고 있다고요.
남자가 세상의 주인의 위치에서 서서히 여자에게로 권력이동이 되고 있다고요.
그런데 아직도 많은 남자들은 착각 속에 빠져 있지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
요. 그러니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남자들은 말년이 참으로 딱하게 되는 거죠.“
내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나름대로 새로운 여성관에 대하여 열변을 토해
내자 기성이는 옳다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기성이는 나이 이야기를 듣고
분명히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한 데서 사회에 대한 반감이 싹 텄을 것
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미 이야기 들어보니 상당부분 공감이 가. 예전의 당신이 아니야.”
“아니예요. 예전의 정미가 맞아요. 단지 사회를 보는 시각이 변했을 뿐이라구요.
그리고 그대를 사랑하는 감정도 그대로고요.”
“나를 사랑하는 감정?”
“내가 이 늦은 시각까지 당신과 마주 앉아 있는 사실이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
나의 고민이 당신을 만나면서 폭발하였어요. 이제 나는 새로운 나의 좌표를 세울
거예요.”
“나의 좌표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면 나의 나머지 인생을 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기존의 썩어 빠진 사회의 시선이 다만 걱정이 될 뿐이라고요.”
“그럼, 남편과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나의 새로운 좌표를 이해해 준다면 이대로 계속 가겠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늦기 전에 각자의 갈 길을 가야겠지요.”
“각자의 갈길?”
기성이는 칵테일이 밍밍하다며 커티샥(Cuttysark) 한 병을 주문하여 스트레
이트로 마셔 댔다. 나는 20년 만에 만나 은근히 나의 가정과 나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어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마치 꿈을 꾸듯 했다. 기정이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마셔대자 나도 호기심에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셔
댔다. 나는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미로로 빠져들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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