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X(1)
엑스(1)
- 여강 최재효
“정미야, 언니다. 정신이 들어온 거니?”
“정미야, 에미다. 에구, 불쌍한 것.”
희미하게 주변 사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누워있는 곳은
중음신(中陰身)의 상태로 저승 문턱이어야 했다. 그런데 팔뚝에 링거바늘이
꽂혀진 상태로 하얀 시트가 푹신한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이다. 대충은 내가 이곳에
누워있게 된 일련의 일들이 추리되어 진다.
그 사람과 부평 승화원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고한 뒤 나는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하였다. 한 줌의 뼛가루로 돌아온 그를 산에 올라 훠이 훠
이 바람결에 승천시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수면제를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의식이 돌아와 이렇게 병상
에 누웠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꼼짝할 수 가 없다. 단지 언니와 칠순의 친정 어머
님이 불규칙적으로 흐느끼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아, 이게 웬일이란 말이냐?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거야? 지금 쯤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어야 할 내가 뭐가 잘났다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벌렁 누워
있어야 한단 말이냐?’
가만히 실눈을 뜨고 눈동자만 겨우 움직여 주변을 살펴보았다. 친정 큰 오빠와 두 딸
아이가 어머니 뒤에 서있는데 큰딸 서영이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큰딸애는 내가
어미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인가?
내가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받은 담당 의사가 내 동공을 까보고 맥을 집어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는 의식이 돌아온 것 이외에는 내 몸에 어느 부위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머리 이외에 신체는 없는 것 같았다. 담당 의사는 나의
이곳저곳을 살펴본 다음 언니를 데리고 나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어느 정도
의식이 돌아왔고 어느 정도 더 입원치료를 받으면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던지 장기간
요양이 필요하니 좋은 요양시설을 알아보라고 할 것이다.
나는 긴 악몽의 터널 끝부분에 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서 그 지옥 같은 터널을
빠져 나가던지 아니면 되돌아가 다 토해내지 못한 원통한 설움을 마주 털어내고 싶다.
왜 내가 하는 일에는 늘 마(魔)가 끼는 것인지. 지금까지 불혹의 성상(星霜)을 살아
오면서 한 번도 그냥 지나간 적이 없었다. 아마 내가 이 세상을 잘못 태어난 것은 아닌지?
혹은 우리 거대한 은하계 중 한 점 티끌에 지나지 않은 지구가 아니라 안드로메다은하 어느 별에 태어나야 할 것은 삼신할머니가 잘못 점지하신 것은 아닌지? 나는 자주
허망한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결혼생활 20년이 막 지날 무렵에 나의 인생사가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내 역사를 스스로 다시 쓸 것이라는 생각은 예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
었다. 서울서 대학을 졸업하는 그해 늦가을에 나는 아버님의 강력한 권고로 결혼을
하였다.
당시 남편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체 대리였지만 건설업계에 종사하는 관계로 곧 과
장으로 승진하면서 주로 외국 건설현장에서 근무하였고 나는 아이들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친인척 이외에는 지연(地緣)이나 학연(學緣)과 거의왕래가 없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남편과 시댁의 보호아래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에서 잔잔히 흐르는 물
같았다.
올봄 진달래가 막 필 무렵 초등학교 동창 중에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미진이가
회사가 쉬는 날이라면서 집에 놀러왔다. 댁의 동창들은 나처럼 집에서 가사에 전념
하는 전업주부였지만 몇몇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미진이는 2년 전 남편을 교통
사고로 잃으면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정미야, 너 혹시 기성이 생각나니?”
“기성이?”
“응, 차기성. 왜 동창 중에서 제일 잘 생기고 키도 늘씬했잖아.”
나는 기성이란 말에 가슴이 떨렸다. 초등학교 때는 기성이가 특별히 나에게 어필
하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인연을 맺으면서 나는 이년 가까이 가슴
앓이를 해야 했다. 대학입시 문제를 그 애와의 열정은 식었지만 늘 그 애의 환한 미
소는 내 가슴 한편에 다 타지 않은 장작처럼 남아 있었다.
“지난번 동창회에 나갔는데 그 애가 너의 안부를 묻더라.”
“그래서?”
“그래서 서울서 애들 잘 키우고 현모양처로 조용히 살아간다고 했지.”
“그래? 그 사람은 뭐한대?”
“응, 지금 조그마한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제법 잘나가는 것 같더라.
동창회에 나오면 2차는 꼭 그 애가 쏘거든. 차도 벤츠를 타고 다니는데 신수가
훤해 보이더라고.”
미진이는 침을 튀겨가며 나에게 그에 관한 정보를 전하느라 신이 난 듯 했다. 원래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미진이지만 이상하리 만큼 기성이 자랑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정미야. 기성이가 너를 한번 꼭 만나고 싶어 해.”
“나를?”
“그래. 동창회가 아니라도 내가 너를 데리고 나오면 근사하게 저녁 한번 사겠다고
하더라?”
“난, 싫어. 너나 나가.”
“계집애, 빼기는. 너나 나나 중년에 접어들어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처지에 동창
애들 한번 만나는 게 뭐 큰 죄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그러니?”
“싫어, 나는 절대 안 나가. 너나 동창 애들 많이 만나서 재미있게 지내. 난 할 일이
많아.”
“아니, 누군 집에 할 일이 없는 줄 아니? 나같이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퇴근하면 밥
하랴, 빨래하랴, 집안 청소하랴 눈코 뜰 새가 없다고. 쉬는 날도 제대로 쉬는 줄 아
니?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계집애 남편도 없으면서 뭐가 바쁘다고.’
“정미야, 그러지 말고 딱 한번만 기성이 만나서 우리 저녁이나 멋지게 얻어먹자. 응?
친구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들어주라. 무슨 우리가 깡패를 만나는 것도 아닌데 그렇
게 빼니, 빼기는?”
지방에서 고등학교 때 올라와 대학졸업하기 까지 나의 서울생활은 말 그대로
요조숙녀였다. 집과 학교 그리고 결혼 이후에는 남편과 아이들 밖에 몰랐다.
최근 들어 수차례 초등학교 동창회 총무로 동창회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있었지
만 나는 선뜻 나가지 못하고 미진이로부터 동창회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런데 갑자기 기성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에 나는 더 깊이 내 내면의 심연
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래, 나도 그 애가, 아니 이제는 그 사람이 보고 싶기도 해. 하지만 자신이 없어.
어느새 중년이 된 내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자신이 없어져. 그런 나를 기성이 본
다면 아마 무척이나 실망할 거야.’
그 뒤로 미진이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기성이의 메시지를 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빚진 것도 없고 그가
나에게 줄 돈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나에게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미진이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미진이가
나에게 멀어질까 두렵기도 했다.
‘그럼, 딱 한번만 만나볼까?’
나의 전화를 받는 미진 이는 날듯이 기뻐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왜 그리 뜸을
드리느냐는 둥,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나올 거라는 둥 몹시 흥분해 하면서 나에게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미진이는 내 의사를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내일 오후 6시 S호텔 커피숍에서 보
자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막상 약속을 하고나니 후회가 되었다. 대충 집안일을 마
치고 마사지실로 직행했다. 3년째 다니는 전문 피부 관리를 해주는 곳인데 그곳
원장은 내가 가면 나를 최고의 VIP 대접을 해준다. 매주 3회 서비스를 받지만 가
격은 서울에서 최고로 높았다.
“어머? 사모님. 점점 더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처음 저희 업소에 올실 때 보다
피부가 더 탄력이 있고 부드러워졌어요. 원래 미인이신 데다가 피부도 하야서 거리
에 나가시면 총각들이 커피마시자고 따라다니겠어요?”
“아이, 놀리시면 싫어요.”
“어머, 정말이세요. 우리업소 단골고객 중 사모님이 제일 세련되시고 멋지세요. 제
가 괜히 사탕발림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원장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나의 어깨부터 허리, 엉덩이 그리고 종아리를 차례로
문지르고 주무르면서 계속 감탄사를 쏟아냈다.
다음날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급해지면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남자 동
창생을 만나기로 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이 뛰면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
었다. 만약 내가 약속을 펑크 낸다면 미진이는 길길이 날 뛸 것이고 기성이는 크게
낙담하면서 나를 원망 할 것이다. 오후 1시경 가까운 미용실을 찾았다. 머리를 스트
레이트로 펴서 힘을 주고 메이크업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뿐했다.
“어머? 사모님, 결혼식 올리는 신부 같아요? 너무너무 고와요.”
미용실 마담은 마사지실 원장보다 침을 튀기며 아첨을 하였고 나는 팁을 평상시
보다 더 주었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이옷 저옷을 대 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봄이니까 분홍색 투피스에 안에 연한 녹색 블라우스에 보라색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었다. 지난 연말 남편이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차니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것 같
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아, 내가 왜 이러지? 마치 선보러 가는 아가씨도 아닌데.’
약속한 장소로 가는 택시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길이 차량들로 막혀 좀 더
천천히 가고 싶었지만 택시는 도심의 바람을 갈랐다.
“정미야, 여기야.”
미진이 벌써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는
분명 기성이 일 것이다. 정미는 전방 30미터 앞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 성능 좋은 컴퓨터처럼 복잡한 수학공식을 풀어내고 있었다.
‘헤어진 지 딱 20년 만이지, 참으로 길고도 짧은 세월이네. 그런데 저 남자는
하나도 늙지도 않아 보이네. 간단히 저녁 얻어먹고 집에는 밤 9시 안으로 들어 가야지. 차암 큰 아이가 내일 시험을 본다고 하니까 그 보다 더 일찍 가야겠어. 큰 아이가 성미가 까다로워서 말이야. 집에 들어가다가 우유와 치킨도 사야겠고.
그러나 첫 인사는 뭐라고 해야 하나?’
“정미씨, 안녕하세요? 차기성입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정미입니다.”
“어머? 너희들 동창끼리 뭐하니 시방? 선보러 나왔니?”
나는 기성이를 보자마자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물 컵만 바라보았다.
기성이도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어색해 했다. 내가 화장
실을 다녀 오고나면서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닌데
가슴이 뛰는 것은 그가 내 첫 사랑이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아무리 동창사이라고
하지만 첫사랑을 만난다는 것은 왠지 가슴 떨리며 두려운 일이었다.
“정미씨,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늘 정미씨 소식이 궁금했어요.”
“......”
“얘, 정미야. 고개 좀 들어봐. 너희들 그때 죽고 못 사는 사이 아니었니? 그런데
뭘 그리 수줍어해?”
“정미씨,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어요.” “......”
“기성아, 내가 보기에는 정미는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것 같어. 우리 여자 동창
애들은 초등학교 앨범 보면 모두 얼굴이 구렁방탱이가 되어서 하나도 몰라보는데
정미만 유독 그때 예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애.”
“미, 미진아.......”
겨우 미진이의 입심 덕분에 차차 나는 고개를 들어 기성이를 볼 수 있었다.
얼굴에 약간 살이 붙은 것 빼고 수려한 외모는 그대로 였다. 한때 밤하늘의 별을
함께 세며 먼 훗날을 약속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젠 중년이 되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이지 몰랐다. 20년 이라는 공백을 한낱
서로가 먹고살기 바빠 잠시 묻어 놓은 세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긴 세월이
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호텔 근처에 있는 서울 시내에서 꽤나 이름난 가든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성이는 은근한 시선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이 처음에는
부담이 되긴 하였지만 차차 예전에 그에게 길들여졌던 자세로 돌아가고 있었다. 교
복을 입고 걸으면서도 우리는 꼭 손을 잡고 걸었고, 자주 선선을 맞추곤 했다. 공원
에서, 극장에서, 유원지에서, 그는 늘 내손을 잡고 다니며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매에 나는 그에게 항의할 것이 있어도 그만 기가 죽어 순하디
순한 양이 되어야 했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게 했고, 수백 번도 더 내 눈물샘을 자극
했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떡 버티고 앉아서 20년전 의 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와 헤어진 뒤 얼마나 많은 여인들에게 웃음을 빼앗고, 얼마나 많은 눈물
을 강요했을까?
고3 말기에 그가 나에게 대학가서 만나자고 할 때, 순진하게도 나는 그의 말을 철
썩 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다음해 재수하여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고 곧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정미씨, 한 잔 받으세요.”
기성이 나에게 술병을 들어 술을 권했다. 집에서 살림하다 보니 남편 이외에는 함께
술 마실 사람이 없었다.
소주 두서너 잔이 전부인 나는 이미 나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소
주가 입 안으로 넘어갈 때 전혀 쓰거나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수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밍밍했다. 술이란 것이 이렇게 위대한 것인지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현모양처가 아닌 사회 어느 한 분야에서 일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인물이 되어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미진이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면서 가버렸다. 나와 기성이는 미진이가 간 뒤
에도 서너 병의 술병을 더 비우고 일어났다. 2차로 기성이 입가심으로 생맥주 한잔
하자며 호프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마치 술하고 원수가 진 사람처럼 생맥주를 마셔
댔다. 나는 그와 보조를 맞추느라 할 수 없이 차가운 맥주를 입술에 갖다 대기는
했지만 마시지는 못했다.
“정미야, 사랑해!”
‘사랑?’
“난, 너를 한 번도 잊어본적이 없었어.”
‘잊어본적이 없었다고? 그럼, 어째서 대학교 입한 한 뒤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던
것이지?’
입에서 금방 튀어 나올 것 같은 말을 나는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잔잔했
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바람에 잘못하면 혈관이 터져 버
릴 것만 같았다.
온몸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어 금방 호프집 안은 피바다가 될 것 같았다. 20년 동
안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나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기성이 미웠다. 무소
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다.
“내, 마음을 알아줘. 정말이야.”
“난, 이미 결혼한 몸이고 가정이 있고 두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간 소식 한번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사랑한다니. 나는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돼. 난, 그때나 지금이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 마음에는 전
혀 변함이 없으니까.”
옛 친구가 어는 날 갑자기 나타나 옛 이야기를 들먹이며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
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함께 동참을 권유하거나 또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
하며 한숨을 쉴 새 없이 쉬어댄 뒤에는 분명 손을 내미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성이
도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20년 전에 단절된 사랑의 끈을 잇자고
하는 것은 평범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 네가 서울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무모하게 들릴지 모르지
만 나는 지난달 이혼했어. 다시 너와 단절되었던 사랑을 다시 잇고 싶어서 그랬어.
너의 남편이나 가족들이 아니 동창 애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나를 가정파괴범 쯤
으로 알겠지만, 난, 난 도저히 이대로 너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안돼요. 안돼요. 왜, 왜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내 앞에 나타나 사랑타령하는
거예요? 저는 도저히 기성씨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도 지금 내 현재의 모습을 깨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못들은 것으로 할거에요. 저 먼저 일어나겠어요.”
“바보, 넌 바보야.”
“그래요. 기성씨, 나는 바보에요.”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그는 내 손을 잡고 앉으라고 하더니 대학교 입학하고 왜 나
를 찾아올 수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 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어떤 궤변이 나
올까싶어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애원에 잠깐 앉아 들어주기로 했다.
“나 대학 들어가고 너희 집에 여러 번 찾아갔었는데, 너는 서울서 재수학원에 다닌
다면서 너희 어머니께서 너에게 내 소식을 전해 주시겠다고 했어. 그때 나는 몸이
안 좋아 일학년 중반에 잠시 휴학계를 냈어. 폐렴을 앓았었어. 그 전에도 나는 폐렴
증세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었지. 대학교 입학하면서 증세가 심해 장기간 요양이 필요했었어. 내가 강원도 어느 절로 요양을 떠나갈 때 너희 어머니
에게 편지를 드렸어. 편지지 열장 분량의 긴 장문의 편지였어. 나는 절에 1년간 머
물면서 너에게서 답장이 한번쯤은 올 줄 알았어. 네가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우리 어머니를 통해 들었지. 아마 네가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더라면 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았을 거야.”
“나에게 편지를 썼었다고요?”
“그래, 열 번도 더 너희 집으로 편지를 보냈었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어머니는 그럴 분이 아니야. 뭔가 잘
목 된 것이 분명해.’
한통도 받지 못했다니? 이럴 수가? 아냐, 이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어. 난 분 명 열통도 넘게 너에 편지를 보냈어. 내 그리움을 너에게 보냈어. 어떤 날은 밤새 쓴 편지에 눈물을 찍어서 보낸 적도 있었어. 정미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나는 기성이 눈물을 찍어 열통도 더 보냈다는 말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술 취한 내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면서 마스카라가 녹아 내렸다. 기성이 얼른 손수 건을 꺼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니에요. 전 기성씨 편지를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었어요.”
“뭐라고?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었다고? 일 년 넘게 열통이 넘는 편지를 띄웠는데
“아니에요. 난, 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정말이라고요.”
‘아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열통도 넘게 보냈다는 편지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기성이 폐렴에 걸려 요양하고 있었던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도대체 무엇
이 어찌된 거야?’
“기성씨, 나 생맥주 한잔 시켜줘요.”
“…….”
나는 목이 탔다. 1000CC 한잔을 단숨에 들이켜 보았지만 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꼬인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1000CC 한잔을 더 달라고 하여 나는 또 벌컥 벌컥 단숨
에 마셔버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은 량의 술을 마신 날이었다. 천정이 빙
빙 돌고 내 앞에 앉아 있는 기성과 주변의 다른 손님들도 빙빙 돌고 있었다.
‘아냐, 이건 분명히 기성이가 나에게 이상한 수작을 걸려고 덫을 놓는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열통도 더 보냈다는 편지가 어째서 나에게 한 통도 전달되지 않았느냐
고? 어머니나 아버지 아니면 오빠들이 나에게 온 편지를 버리거나 찢어버렸다는 것
인가? 아냐, 아냐. 우리 가족들은 그럴 사람들이 절대로 아냐. 분명 뭔가 잘못 되었
을 거야. 아냐, 이건 아냐. 아니라고.’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