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素女(최종회)
소녀素女(최종회)
- 여강 최재효
오전에 한 차례 비가 온 뒤로 하루 종일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다
녀야 했다.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로 남국의 불야성 도시는
더욱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온 종일 걸은 탓에 피로가 엄습해 왔
지만 곁에 있는 여인을 집으로 보내고 혼자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
다.
호텔 현관까지 오면서 내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걷던 그레실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후의 스케줄을 어떻
게 짰으면 좋을지 머리를 회전시키면서 그녀 나름대로 묘안을 강구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로 객실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내가 그레실을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간다면 룸메이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가 현지 아
가씨를 낚아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레실을 아무 남자에게 몸을 내
맡기는 싸구려 창부(娼婦) 둔갑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
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레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동정을 살피던 그레실이 호텔 현관문에 들어서자 걸음을
멈추었다.
“Honey, Do you have a good idea?"
"……."
"I wanna go to night club located in this hotel for to kill time."
그레실이 내 허리를 안고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Ok, that's a bright plan. Go there my darling."
나는 흔쾌히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만일 내가 대답도 못하고 우물
쭈물 대면 재미없는 남자로 비춰질까 두려웠다.
그녀의 즉석 제안에 내가 주저 없이 응하자 그녀도 기분이 좋은 듯 얼른
나에게 팔짱을 끼더니 지하로 안내했다. 나이트클럽은 벌써 많은 사람들
로 북적였다. 웨이츄레스의 안내를 받아 중간 쯤 자리를 잡았다. 3인조
여성 보컬그룹이 나와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비트 뮤직을 울부짖듯 토
해 내고 무대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몸을 흔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의 조급성이 탄로
날까봐 꾹 참고 나이트클럽 안을 살펴보았다. 규모는 서울에서 물 좋은
나이트클럽보다 작아 보이긴 했지만 내부 인테리어나 음향기기의 음질은
더 뛰어 난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의 반 이상이 손님들에게 점령되었고
중키의 토종 종업원들은 거의 날듯이 테이블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레실이 대충 술과 안주를 시켰다. 차차 나이트클럽 내부가 시야에 포
착되기 시작했다. 자세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당수의 손님의 옷차림과
행동 그리고 크게 떠들어 대는 모습이 틀림없는 중년의 동포들이었다.
마치 자신들의 안방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염병, 나와서도 그 버릇은 남 못주는구먼.’
내가 혼자말로 중얼거리자 그레실이 묘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얼른 술을 따르며 씽끗 웃어보이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에 이어 고객들의 연령을 고려했는지 스모
키의 ‘I'll meet you at midnight'가 빠른 템포로 연주되기 시작하고
금발의 남자가수가 열기를 토해내기 시작하자 무대 위에 있던 각국의
인종들이 환호하면서 몸을 흔들어 댔다.
이미 술 두병이 바닥을 보였다. 저녁을 들면서 마신 토속주와 독한
술이 뱃속에서 섞이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레실은 연거푸 잔을 들
며 나에게 강요하다시피 했다.
‘아니, 오늘 밤 술독에 빠지려고 작정했나?’
남자 체면에 나는 그녀의 제의에 바로 바로 응해 주었다. 서서히 속이
뜨거워지면서 몸도 뜨거워졌다.
“Honey, Shall we dance?"
"Good."
내가 그레실의 보드라운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자 그녀는 무척 신이
났는지 나가면서도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히프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백인들과 토종원주민들의 그룹을 피해 동양
인들이 춤추는 그룹 옆에 자리 잡았다. 스모키의 크리스 노만 목소리를
거의 흡사하게 남자 가수가 피를 토하듯 빨간 밤의 열기를 뿜어 냈다.
백인들과 원주민들 보다 극동 아시안들은 묘한 포즈를 잡아가면 신들
린 듯 몸을 흔들어 댔다. 한민족 특유의 고고, 디스고, 막춤 등이 시끌벅
쩍 하게 연출되면서 무대는 금방 활화산처럼 달궈졌다.
내가 그들과 합세하자 그레실도 내 뒤에 바싹 붙어 신들린 듯 몸을 흔
들어 댔다. 상당한 미모의 이국 여인의 내 뒤에서 그림자처럼 몸을 흔들
어 대자 춤을 추던 동포들은 우리를 주시하며 몸을 흔들어 댔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연놈들이 무대를 휘젓고 다니나?‘하는 시선들이었다.
나는 동포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그레실과 마주 서서 묘한 포즈
까지 연출해 가면서 우리의 영혼까지 비틀거릴 정도로 흔들어 댔다.
천정의 비트 조명들이 모두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거의 한 시간 이상 다양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댔다. 이미 아래 위
속옷은 땀을 흡수해 축축했다. 그레실 역시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술 취한 상태에서 너무
격한 운동을 하면 자칫 혼절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노래가 끝나가
얼른 그레실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Honey, excellent! very nice!"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그레실이 엄지손가락을 보이면서 나의 열정적인
춤 솜씨에 놀랐다면서 두 팔까지 벌리면서 오버액션을 취했다.
“You are a best dancer and sexist lady in this night club."
"Honey, Thank you!"
나의 찬사에 고조된 그레실은 연신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잔을 비우자 그레실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여러
가지 술을 섞어 마신 탓인지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금방
그레실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허니, T가 이곳으로 오겠대요. 괜찮죠?”
“물론이지. 그 친구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군.”
나는 백만 대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오늘밤 그레실을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T가 합석하면 나는 T에게 그레실
을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 주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니, 우리 건배해요. 오늘 밤이 일 년이고 백년이고 아니, 영원히 지
속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레실, 그건 나도 동감이에요.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T가 나타났다.
“Hi, everyone."
"Hello, T."
우리는 마치 10년 지기(知己)라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다시 술병과 안주가 배달되고 노래가 시작 되면서 우리들은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T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
기 도중에도 나와 그레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슬쩍 슬쩍 훔쳐보았다.
아마도 T의 눈에 우리가 간밤에 만리장성이라도 쌓은 사이처럼 보였으
리라. 음악소리에 고막이 터질 정도의 나이트클럽 안에서 그의 귀에 대
고 ‘간밤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5명의 남녀 혼성 그룹이 나오더니 London Boys의 'Harlem
Desire'를 빠른 창법으로 열창하기 시작하였다. T가 나와 그레실의 손을
잡아끌더니 무대로 나가자고 하였다. 무대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
도로 손님들로 꽉 찬 상태였다.
T는 어렵게 길을 열고 나와 그레실을 무대 한가운데로 인도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잡종들이 모여 거대한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검둥이
흰둥이 누렁이 온갖 잡종들이 뒤 섞여 만들어내는 열광의 도가니는 보는
것 자체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강렬한 비트 음악 이 흥분의 세계로
우리 일행을 인도 하고 있었다.
마치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 이승의 재수 좋은 군상들 같아 보였다. 그 무
리 중에 나와 그레실이 함께 동승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내가 돌고
그녀가 돌고 T가 돌고 천정과 바닥이 빙빙 돌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
흔들기를 한 시간쯤 되자 비트음악이 끝이 났다. 그런데 나와 그레실이 막
자리도 돌아가려고 하자 T가 우리를 붙잡았다.
무대에는 음악에 취한 듯 서너 쌍만이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다음에 나올 음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고 조명(照
明)이 은은하게 바뀌면서 남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더니 영어로 안내
방송을 했다.
Ladies and gentleman !
Tonight, I introduce an international couple to you. He is a korean,
She is a native. They meet after thirty years' absence. They were
penpal before 30years. This is a big event since our club has be
opened. Please, give them a big hand.
사회자의 안내가 끝나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나와 그레실을 비췄다.
동시에 Congratulation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나이트클럽안의 손님들이 일
제히 일어서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나이트클럽은 열광의 도가니 그 자체
였다. 나는 순간 기획력이 뛰어 난 T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나와 그레
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었다고 판단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
지 않던 T가 갑자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Gresil, Mr C, Congratulation."
"Thank You Very much. Mr, T."
나와 그레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T를 끌어안았다. 무대에서 세 사람
이 포옹하자 손님들은 휘파람을 불며 미친듯 박수를 쳐댔다. 여기저기서
한국말로 ‘파이팅!, 축하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그레실 그리고
T는 손님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미스터 T, 어찌 된 거요? 미리 이야기나 해주지 않고요?”
“여기 총지배인이 내 친구입니다. 내가 두 분을 위해서 깜짝쇼를 준비했
어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용서해주세요.”
“용서라니요. 내 생애 오늘은 최고의 날입니다.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로
개구장이에요.“
자리로 돌아 온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국적을 잊고 일심동체가 되어 술을 마셔댔다. 이국의 도시는 점점 더 뜨거
워졌다.
T는 자꾸만 나와 그레실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는 30년 만에 만난 우리
가 진정으로 커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신 나와 그레실
의 해후를 축하한다며 우리보다 더 즐거워했다. 나는 점점 혼미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비틀거리며 화장
실로 달려가 입속으로 손가락을 넣고 억지로 뱃속의 내용물을 토해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지구를 떠나 은하수의 어느 별에 와서 별나라의 공주를 만나고 있
다고 생각하였다. 그별이 지금까지 내가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오면서 쌓
였던 온갖 번뇌를 말끔히 씻기고 늘 꿈꿔왔던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늘 내 뇌리에 자리 잡고 나를 원격 조정했던 별나라 공주를
만나서 그간의 서러운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에 술에 찌든 초췌해 보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어수룩
한 소년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간신히 테이블로 돌아오자 그레실과 T가 보이지 않았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때 웨이츄레스가 다가오더니 나를 출구로 안내했다. T가
관광택시를 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Mr, C."
T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T가 앞좌석에 타고 택시기사에게 뭐라
고 하였다. 뒷좌석에 그레실이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택시가 미
끄러지면서 도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레실이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왔다.
나는 택시가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여기가 택시 안 인지 호
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면서 피곤이 엄습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객실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디지털시계가 오전 9시3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이 몹씨 말랐다. 객실은 한국 여행사가 지정해 준
그 객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조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내가 3일간 묵기로
예약된 호텔 같았다. 눈을 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구에게 얻어맞
은 듯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누워 지난밤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이트클럽에서 택시를 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
다.
간신히 몸을 돌려 옆을 보았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는 트윈베드가 분명
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잠옷 차림의 나 혼자 뿐이었다. 머리
가 혼란스러웠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간신히 일어나 냉수를 들이켰다.
창문 커튼을 걷자 방안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탁자 위에 곱게
접힌 하얀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Last night, I sew heaven and appreciated peace. I'll come here
10 o'clock am.
‘Oh, My darling.'
내 베개 옆에 놓여있는 베개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서너 개
베개와 하얀 시트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베개에서 향긋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아아, 그레실…….’
10시에 그녀가 온다고 했으니 빨리 일어나야 했다. 점점 기력을 회복하면
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면서 그녀의 얼
굴을 그려 보았다.
간밤에 그녀도 대취했었다. 남자도 아닌 여인이 술을 나와 비슷한 량을 마
시고 아침 10시까지 올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뒷머리가 띵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대충 단장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열른 문을 열자 하얀 물방울무늬가 점점이 박힌 파란색 원피스 차림의 그
레실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Did you have a good sleeping?"
그레실이 객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를 껴안았다.
“Happy Morning, Darling!"
나는 그레실을 잠시 안으며 그녀의 머리칼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아
보았다. 베개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아침을 들고 호텔을 나오자 그레실이 택시를 잡았
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면서 나를
힐끗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레실, 어디?”
“그냥 저를 따라가시면 돼요.”
10분 후 택시가 도착한 곳은 큰 병원이었다.
“여기는 내가 일하는 병원이에요. M시에서도 꽤 큰 병원에 속해요.”
우리가 병원 현관에 내리자 경비원들이 얼른 달려와 그레실에게 거수 경
례를 하면서 정중히 예의를 표했다. 나도 얼떨결에 그들의 경례를 받고 얼
른 오른손을 올려 응수했다. 그녀는 10층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나를 안내
했다.
“Wonderful! good view."
"Thank you, Honey. Please sit down."
그레실은 커피를 타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진한 원두향이 후각을 자극
했다.
“드세요. 슈가는 넣지 않았어요.”
그레실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음-, 아주 맛이 좋아요.”
“고마워요. 허니,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들어 주실 거죠?”
그레실은 내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지 몹시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럼, 무엇이든지 말해 봐요.”
“허니,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녀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주사기를 가지고 나왔다.
‘아니? 무슨 독감주사나, 예방 주사라도 놓으려고 그러나?’
“허니, 혈액형이 어떻게 되나요?”
“나는 O형인데…….”
“아하, 그렇죠? 30년 전 허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도 허니가 O형이
라고 한 적이 있어요. 잘되었어요.”
그녀는 내 피를 뽑아서 자신에게 수혈하고, 대신 자신의 피를 나에게 수혈
하겠다고 했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섰다.
‘아니,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가? 만약 그레실이 에이즈나 기타 성병 등에
감염되었다면 나도 꼼짝없이 감염되는 것 아닌가’
잠시 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레실은 빙그레 웃으면서 서류를 나에
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며칠 전, 이 병원에서 질병 감염여부를 조사한 결과서에요. 우리
의사들은 보통 일 년에 서너 번 검사를 받아야 해요.”
“아, 그래요. 참 다행이네요.”
“다행히 나의 피와 허니의 피가 섞여도 아무런 이상반응은 없어요.”
그녀가 보여준 확인서를 보고 나는 흔쾌히 채혈과 수혈을 허락하였다. 서
로의 피를 수혈한 뒤 나는 그레실을 꼭 안아주었다.
병원을 나온 우리는 M시와 M시에서 가까운 관광지를 찾아 즐거운 한때
를 보냈다. 하루의 해가 우리를 질투하는 것이 분명했다, 금방 M시는 불야
성으로 변했고, 한국식으로 저녁을 들고 그레실을 택시를 태워 보낸 뒤 나
는 한국 여행사가 지정해 준 객실에 들었다.
“허니, 언제 또 오실거에요?”
“…….”
“곧 다시 오실거죠?”
“…….”
다음 날 오후, 그레실은 공항 대합실에 나와 내 손을 꼭 잡고 계속 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지난 3일간의 해후는 30년 보다 긴 것 같기도 했고, 짧
은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 이곳에 불법체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링, 걱정하지 말아요. 곧 다시 찾아올게요. 아니면 그대가 서울에 올 수
도 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어요.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는거에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허니-.”
백설보다 하얗고 청순한 그녀를 뒤로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