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8. 11. 18. 00:28

 

 

 



 

                        

 

 

 

 

 

 

 

          소녀(素女)(3)

 

 

 


                                                                                                                                                        - 여강 최재효

 

 

 


 T가 얼른 내리더니 서류봉투로 그레실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 한

국의 남정네들 같으면 자신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T처럼 진심어린

마음으로 여인의 안전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상의를 약간 적신 나는 옷에 묻은 빗방울을 툭

툭 털며 그레실을 바라보았다. 집에서 마신 술로 그녀의 얼굴은 살짝

분홍빛을 뗬다. 막상 호텔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여행사에서 호텔 예약할 때 남자 두 명이 객실 하나를 쓰도록 했기 때문

이다. 만약 내가 혼자 독방을 쓴다면 그레실과 T를 방으로 안내하여 밤

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싶었다.


 그렇다고 T를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뒤에 그레실과 호텔에 들 수는 없

었다. 내가 그녀에게 함께 호텔에 투숙하자고 하면 어떤 반응이 올지 무

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이역만리 온 것은 농염한 여인의 육덕(肉德)

이나 안아보자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이성을 지배할 수 있었

다. 그레실 곁에서 농담을 주고받던 T를 불러 보자고 했다. 갑작스런 그

레실의 동행에 그는 태연하였다.


 “어떻게 하죠? 나는 한국에서 함께 온 남자와 방을 함께 써야하는데?”
 T는 되레 내가 이상하다는 눈치다.
 “오우, 미스터 C. 당연히 다른 객실을 대여해 그레실과 함께 밤을 지새야

지요. 내가 지난 주 그녀를 병원으로 찾아 갔을 때 그녀를 설득하여 미스

터 C와 함께 밤을 지내는 것으로 했어요.”


 ‘뭐라고? 나와 밤을 지새는 것으로?’
 나는 갑자기 종아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안돼요. 나는, 나는 그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지 다른 그 어

떤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내가 기분 나쁜 어조로 T에게 항변조로 말하자 T는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늦은 밤 남녀가 호텔까지 왔으면 당연히 함께 밤을 보내는 것 아니냐‘하는

시선으로 T는 나라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레실은 나와 T가 옥신각신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두 남자가 언쟁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T에게 프런트로

가서 객실이 있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곧 함지박만한 입을 벌리고 T가

뛰어오면서 다행히 호텔에 객실이 딱 하나가 남아있다고 했다. 방이 두개

면 모르지만 방 하나에 남자 둘, 여자 한명이 들어간다면 접수하는 남자
직원은 우리를 무슨 해괴망측한 짓을 하러 온 사람으로 볼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다?’
 그렇다고 이 시각에 T보고 집으로 가라고 하면 그는 ‘너도 별 수 없는

남자로구나.’하고 나를 속으로 비아냥거릴 것이다. T에게 세 명이 방 하

나를 얻어 함께 밤새도록 술이나 마시자고 했지만 T의 표정은 그리 유

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일단 방을 하나 대여해서 T와 그레실을 들어가라고 하

고 나는 짐을 풀어놓은 내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면 되겠지. 그리고

밤새도록 셋이서 술을 마셔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 될 거야.’


 T는 나의 제안 마지못해 따랐다. 두 남녀를 먼저 객실로 올려 보내고 나

는 내 짐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행사에서 정해준, 나보다 나이가 좀

어려 보이는 룸메이트는 잠을 자지 않고 성인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어디를 다녔느냐면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호텔 지하 바(Bar)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대여한 객실이 2312호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0개 층을 더 올라가야 했다. 호텔은 A급이어서

호텔 벽 내장재는 흰색과 검정색 대리석으로 치장하였고 복도는 붉은 양탄

자가 깔려 있어 호사스러움을 더해주었다. 벽에는 고흐와 렘브란트의 그림

이 걸려 있었다. 아무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금방 2312호 문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막상 노크를 하려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남의 정사(情事)를 훼방 놓는 것 같았다. 노크를 하려다 잠시 멈추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문에 귀를 대고 숨을 죽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나 몰라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똑똑똑 -
 10초가 지나도 안에서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세게 노크를 하

였다.


 똑똑똑 -
 또 10여초가 흘렀지만 안에서 아무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순간 나는 여우

에 홀린 것 같았다.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분명 통증이 전해졌다.


 “그레실, 그레실, 나에요. 미스터 C. 문 좀 열어주세요.”
 계속 문을 세게 두드리며 그레실을 불렀다. 서너 번을 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Mr, C?”
 “Yes, I am”
 문이 열리면서 은은한 조명 속에 하얀 나이트가운 차림의 그레실이 웃으

며 문을 열어주었다. 잠시 잠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T는 화장실에 있

거나 안에서 술을 마실 거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객실

안에 T는 없었다.


 “그레실, T는 어디 있어요?”
 “…….
 “그레실, T는?”


 “그는 자신의 집으로 갔어요. 내일 아침 10시쯤 이 호텔로 온다고 했어요.”
 “뭣, 뭐라고요? 그럼, 이 방에 나와 당신 단둘이 있단 말이에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는 내가 객실 안에 들어오자마자 객실 내부를 이리저

리 살펴보더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미스터 C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거 아니었어요?”


 “네에? 내가 시킨 거 아니냐고요? 오, 노노. 나는 이방에서 우리 세 명이 밤

을 지새워 가며 술을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그레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상하다

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나를 들어오라고 했다.


 ‘아아, T가 장난을 쳤구나. 망할 자식 같으니. 내가 결국은 그레실의 육신

이 그리워 이 방으로 온 것 밖에 안 되는 구나. 어찌해야 나의 순수한 마음

을 설명해야하나?’
 난감했다. 냉수 한 컵을 입안에 털어 넣고 그레실에게 차근차근하게 나의

계획을 설명했다. 나의 진땀나는 설명을 다 듣고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Darling, Please Come here.”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따랐다. 창가에 있는 타원형

테이블 위에 스카치위스키 병이 놓여있었다.


 “나는 그대의 진심을 알아요. 만약 T가 눈치 없이 이 방에 있다면 내가 내

보냈을 거예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그, 그레실?”


 “Honey, Please don't say anything now. Please…….
 “…….


 “당신은 30년 전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 내가 겪었던 일을 들어보세요.

나는 언젠가 당신이 나를 찾아오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레실은 위스키를 스트레이트 잔으로 연거푸 석잔 을 마시더니 핸드백

에서 말보로를 꺼냈다.


 담배를 맛있게 피워대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은은한 불빛에 서서히

녹고 있었다. 30년 전 그녀는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어느 날, 한국에서 배

달된 편지를 받아 든 순간 그녀의 가슴은 콩닥거리며, 엉성하지만 또박 또

박 쓰여진 이국 소년의 영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사진 속에 자신보다

1살 많지만 우수에 젖은 눈과 연한 미소의 이국 소년이 마음에 쏙 들었고

그날부터 하루에도 열 번도 더 내 사진을 꺼내 봤다.


 소년이 살고 있는 코리아의 지도를 거의 매일 보면서 언젠가 서울을 방

문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꿈은 20년 후 이루어 졌지만, 소년은 만날 수 없

었다. 아직도 그녀는 병원 사무실에 그때 이국 소년이 보낸 편지의 대부

분을 보관하고 있으며, 자주 읽어보며 30년 전 추억을 되 씹곤했다.


 나이를 먹으면 남자나 여자나 과거에 자주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

분명한 같았다. 특히 현재의 자신의 주변이 과거보다 못하거나 곁에

있는 반려자가 기대에 못 미칠 경우 과거로의 회귀는 더욱 빨라질 수 있

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웃으며 혹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한마디 한마디 토할 때 마다

나는 그녀가 고질병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백약이 무효인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30년 전이면 그녀의 나라가 대한

민국보다 풍요했다. 그녀는 소년에게 편지를 보낼 때 꼭 선물을 동봉
했다. 그녀가 소년에게 자주 보낸 것은 T셔츠였다. 세계의 유명 축구인

얼굴이 인쇄된 빨강, 노랑, 흰색 등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 된 T셔츠를

보내왔다.


 소년은 답으로 한국 전통 인형을 보내 주거나 과자류를 예쁘게 포장해

서 항공우편으로 부치곤 했다. 특히 그녀는 방울이 달린 머리끈을 좋아

하여 소년은 자주 여성 액세서리 판매점이나 누이에게 부탁해 백화점에

서 예쁜 물건을 구입해 보내 주었다. 소녀는 이국의 소년이 보내준 머리

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찍은 사진과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선물이 오

고가고 편지의 사연이 점점 핑크빛을 띠면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소년,

소녀는 많은 밤을 지새우거나 한숨으로 보내야 했다.


 이야기를 잠시 멈춘 그레실은 나에게 술을 건넸다. 나도 연거푸 석잔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녀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나

는 다시 그녀에게 술잔을 건넸다. 술잔을 비운 그녀는 말보로를 태우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 연기는 어느 무심한 소년에 대한 원망을 30년

만에 토해내는 것 같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그녀는 의

학술세미나 참석 차 한번 그리고 개인적 볼일로 또 한 번 서울을 방

문했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여러 날을 함께 숨 쉬면서도 그녀는 옛

소년을 만나지 못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더라면 쉽게 소년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사내가 인터넷을 이용하여 30년 전 여인을 만난 것처럼. 자

신의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떠날 때 그녀는 속상하고 원

통한 마음에 눈물을 뿌려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 M시에 착륙할 때까지

그녀는 계속 울면서 가곤 했었다. 30년 전의 소녀가 토해내는 한(恨)서

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레실, 미안해요. 나도 그동안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요. 그러

나 당신을 찾을 길이 없었어요. 아마 내가 당신과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국제무역을 담당하는 부서에 입사하였다면 분명 당신을 만났

을 것이오.


 그렇게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을 하였을 거예요.

이렇게 이국에서 밤을 지새우며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예요. 미안

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내가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로 미

안해요. 나를 미워해도 됩니다. 나를 차라리 실컷 때려주세요.”


 “What were you doing when i was staying in Seoul?”
 “나 역시 서울에 있었고, 회사 일에 눈코 뜰 새 없었답니다.”

내가 동시에 서울에 있었다는 말에 그녀는 흐느꼈다. 어깨를 가늘게 떠

는 그녀를 나는 살며시 안아 주었다. 30년 전 한때 내가 꿈꾸었던 일이

이제야 현실이 되었다. 내가 안아주자 그녀는 더욱 크게 흐느꼈다.


 “그레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나 역시 당신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나나 당신 곁에 새로운 사람이 있으니 어찌할

수 없잖아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내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자 그녀는 지나간 긴 설움을 한꺼번에 토

해내려는 듯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5년 전 끊은 담배를 피워 물

었다. 그녀의 통곡 소리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뿌렸다.


 “그레실, 울지말아요. 이렇게 당신 곁에 30년 만에 찾아왔잖아요. 이젠

우리 영원히 친구하기로 해요. 영원히…….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당신을 만나는 순간부터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당신이 아버지 집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 가족들 모두는 무척

흥분했었어요. 30년 전 사윗감이 왔다고 아버지는 속으로 무척 기뻐하셨

을거에요. 아버지 역시 당신에게서 편지가 올 때마다 신기해 하시며 당신

편지를 읽고 또 읽으셨어요.”


 “아아, 그랬어요?”

 “어머니와 동생들 역시 당신에게서 편지가 오면 빙 둘러 앉아 당신의

시지를 읽고 기뻐했어요. 특히 어머니는 당신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내가

당신에게 보낸 T셔츠는 모두 백화점에서 어머니가 골라 주신거에요.”


 “그레실, 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군요?”
 “저는 그때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생각나요. 우체국에 가서 당

신에게 편지를 부칠 때가 나는 가장 행복했어요. 늘 두 여동생들과 갔었는

데 그 애들도 당신을 무척 좋아했었어요.”


 “아, 내가 당신 아버지 집에 갔을 때 꽃을 준 그 여인들이 당신 여동생이

었군요.”
 “그 애들도 한국말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요. 나는 당신이 보내준 한국

어 회화책으로 혼자 공부를 하였어요. 그리고 나중에 우연히 이곳에서 한국

인 유학생을 알게  되어 한국말을 꾸준히 배웠어요.”


 그레실은 담배를 다 피우고 나더니 위스키 한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천천

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에게서 더 이상의 아무런 소식도 없고 나를 찾기

위해 서울엘 두 번이나 다녀갔지만 별 소득이 없자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결혼 상대자는 같은 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코라손

이라는 남자였다. 코라손 은 다정다감하고 무척 가정적인 남자였으며, 처

가에 남다른 애정을 쏟는 남자였다. 코라손 과 결혼은 했지만 그녀는 습

관처럼 북녘 하늘을 자주 바라보았다. 그녀가 결혼한 다음 해 어느 여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남부의 휴양도시로 바캉스를 갔다가 코라손이 사고

를 당했다. 


 한 낮에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갔던 남편은 그만 운전 부주의로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바람에 거의 죽음 직전에 구조되었지만 다리

한쪽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3년 동안 병원에 누워있던 코라손은

퇴원했지만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혼하려고 수백 수천

번을 결심하였으나 크리스천인 그녀는 차마 곤경에 처한 남편을 버릴 수

없었다.


 지금은 재활의학 덕분에 의족(義足)을 하고 겨우 혼자 걸어 다닐 수는

있지만 금방 힘에 겨워 했다. 코라손은 인정 많은 친정 부모의 배려고

현재는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서 아버지의 병원일을 있었다.


 ‘아아, 그레실은 한창 나이인데…….
 나는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비록 나이는 나와

비슷하지만 그레실은 아름다운 미시였다. 그런 이국의 미인과 호텔에

들어 함께 술을 마시며 지난 30년의 슬픈 이야기를 듣는 다는 것이 가슴

을 짓눌렀다.


 평소 불교에 심취해 사소한 인연이 얼마나 큰 결과를 만들낼 수 있는

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깊은 밤 눈물을 흘리며 30년 전 이국(異國)의 사

랑에게 자신의 속내를 토해내고 있는 여인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책임이고 나의 부덕의 소치라고 자책하였다. 


 냉장고에서 다시 스카치위스키와 캔 맥주를 꺼냈다. 아무리 마셔도 취

하지 않았다. 내가 위스키 1온스를 큰 컵에 따르고 8부정도 맥주로 채운

뒤 휘휘 돌린 후 마셨다. 술이 고소하면서 입에 착달라붙었다. 내가 혼합

주를 만들어 마시자 그녀도 한잔 달라고 하였다. 이곳에서도 남자들이
자주 이렇게 만들어 마신다고 했다. 자신도 직원들과 파티를 열 때 가끔

마셔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레실, 집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Yes, My mother knows me.”
 “네에? 그럼, 당신 남편도 알고 있단 말이에요?”
 “남편도 내가 당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안심할거에요.”


 ‘안심?’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자신

의 아내를 데리고 호텔로 간 행위에 대하여 안심을 한단 말인가? 갑자기

정신이 아득했다.


 ‘이국에서 온 남자와 30년만의 해후라고해서 온 가족이 너그럽게 그녀의

행동에 대하여 이해를 한단 말인가?’


 P국은 성적 모럴이 엄격히 적용되는 나라였다. 미혼일 경우 성에 대하여

관대하지만 기혼의 성에 대하여는 무척 엄한 풍습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자신의 아내가 외간남자와 호텔에 든 것을 안심하고 있

단 말인가? 지금까지 마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나는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혼합주를 만들어 모두 마셔 버렸다. 그레실은 내가 걱정이 되는지 자

꾸만 오렌지 주스를 마시라고 했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당신 남편이 알

고 있단 말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T는 이곳에서 유명한 신문 기자예요. 남편이나

부모님은 내가 T의 집에서 당신과 밤새 파티를 즐길 거라고 생각하고 계

실 거예요. 우리는 파티를 한번 시작하면 밤을 새우는 습관이 있어요. 물

론 이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나는 매일 아침 6

까지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가족들은 잘 알고 있어요. 내일 아침에

도 나는 병원에 있을 거라고 믿을 거고요.”
 

 ‘아, 그러면 그렇지. 이국의 사내와 자신의 성숙한 아내가 호텔에 함께

투숙한 사실을 알고도 안심할 수 있는 남자라면 분명 정신 치료를 해봐

야 할 거야.’

 혼합주를 마신 그레실도 어느 정도 술이 오르는지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나, 나 당신하고 아침까지 이 방에 있으면 안 돼요?” 
 “그레실, 아침 6시까지 출근해야 한다면서요?”


 “나, 이틀간 특별휴가 냈어요.”
 “이틀간요?”


 “네에, 휴가낸 이유는 30년 만에 나를 찾아온 당신을 위한 배려에요.”
 “나를 위한 배려라고요?”
 “Please, don't question anything. shall we dance?”
 
 나는 그녀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

다.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국의 아내가 만약 이런 장면을

목격 한다면 무어라고 할지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레실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레실, 울지말아요. 내가 당신이 보고 싶어 왔잖아요. 당신을 찾기

위해 이곳의 유력 신문사와 방송국 홈페이지를 수천 번도 더 들락거렸

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T를 알게 되었고 다행히 한국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T는 나의 부탁을 들어 주었어요. 그가 당신을 찾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당신의 소식을 전해왔을 때 나는 그만 너무 기뻐서 울뻔

했어요.”


 “Really?”
 “그럼요?”
 그레실이 흐느끼다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팔에 힘을 주자 그녀가 깊게 안겨 왔다.  


 “그레실.”
 “네에?”


 “그때, 나를 정말 좋아했었어요? 30년 전에?”
 “…….
 “안 좋아했나보군요.”


 “바보, 당신은 바보에요.”
 “응, 바보?”
 “내가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순간 당신 품에 안겨 춤을 추겠어

요?”


 “그런가?”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향긋한 살내음이 코를 찔렀다. 점점 나는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30년 만에 찾아와서 마치

맡겨 두었던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나는 이국

의 여인에게 큰 빚을 진 빚쟁이였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갚아야 할지 금방 해답이

떠오를 것처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다

시 나를 놓치면 영영 볼 수 없는 불행이라도 닥칠 것 같은 눈빛으로 자꾸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실의 볼룩한 육감이 술기운에 팽창된 나의 욕

망을 자꾸 시험하기 시작했다. 


 ‘아아, 어찌해야하나?’
 혈기 왕성한 남녀의 30년만의 해후가 만든 열망은 비록 내일 지구가 멸

망한다고 해도 거칠 것이 없을 듯 싶었다. 분명히 내 몸은 대취하여 흔들

거리는데 정신은 맑았다.


 ‘이 대로 이 여인과 함께 무너져야 하나? 안 돼,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그건 너무 파렴치한 짓이야. 나는 끝까지 동방예의지국의 자존심을 지

켜야 해. 절대로 무너지면 안 돼. 30년을 기다려 왔는데 까짓것 저승에

가서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Honey, Hug me, kiss me. Please.”
 “…….
 “그레실, 나 머리가 아파 죽겠어. 우리 잠시 앉아서 쉬면 안 될까?”


 “오우? 많이 아파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걸 거야. 잠시 쉬면 될 것 같은데......”
 그레실 역시 대취하여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얼

른 화장실로 들어가 그냥 변기 뚜껑을 깔고 앉아 있었다. 하늘과 땅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여보, 지금 거기서 무얼하시는거에요?”

 “아빠, 아빠, 정신 차리세요. 거긴 여우굴이에요. 빨리 나오세요. 아빠.”
 “얘야, 너 거기서 무얼 하는 거니? 너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몸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는 거니? 응? 어서 정신 차려 이것아.”
 아내의 환영과 두 딸들 그리고 팔순의 노모의 얼굴이 차례로 보이다가 사

라졌다.


 ‘아아, 안 돼. 안 돼.’

 거울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이승의 욕망에 찌든 웬 중년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분명했다. 내가 삿대질을 하면 그도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나에게 욕을 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오늘 일을

떠올려 보았다.


 활동사진처럼 하루의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속이 울

렁거렸다. 속의 내용물을 모두 쏟아내고 나니 한결 속이 가벼웠다. 잠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잠은 침대에서 자야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일어서려고 했지만 일어 설 수 없었다. 눈꺼풀이 천근이

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나는 변기에 앉은

상태로 옆으로 기대어 코를 골고 있었다. 깜빡 잠이 잠이 든 상태였다. 희

미한 화장실 전등이 나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다시

변기 뚜껑에 앉았다. 


 ‘아, 그렇지. 그녀와 함께 왔었지.’
 내가 화장실을 나왔을 때 나는 숨이 멎을 뻔 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