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최종회)
편지(최종회)
- 저자 : 여강 최재효
희미한 중환자실의 실내조명은 약간 어둑했다. 미연은 너무 밝은 실내
보다 흐릿한 공간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수의 초췌한 얼굴을
보면 감정에 복받쳐 차마 경수를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간호
사가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 채고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미연이 살며시 다가와 꼼짝 않고 누워있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미연이
중환실로 들어오자마자 경수는 눈을 감았다. 질끈 감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연이 손수건을 꺼내 경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두 사
람은 사이에 천근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경수는 눈을 감은 채 살며시 미연이의 손을 잡았다. 눈물을 닦던 미연은
경수의 행동에 가만히 응해주었다. 25년만이었다.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헤어지고 25년 만에 병원 중환자실에서의 상봉이었다. 중환자실에 두 사
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경수의 얼굴은 흔건했다. 미연의 양 눈에서 떨
어지는 눈물도 경수의 얼굴에 떨어졌다. 경수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미연
이 응수하며 같이 힘을 주었다. 삼십여분 정도의 고요가 두 사람 어깨를 지
배했다. 미연이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멈추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미연아, 미안해.”
경수가 가늘게 눈을 뜨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이 못난 오빠를 용서해주는 거지?”
미연이 어깨들 들썩거리며 흐는겼다.
“바보같이 울긴.”
“오빠, 아무말씀 하지마세요.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의사가 이틀정도 안
정을 취하시면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아무말씀
하지마시고 푹 쉬셔야해요.”
“그래, 고맙다. 이렇게 중환자실에서 미연이를 다시 보니 내가 너무 바보
같아보여.”
“아니에요 오빠. 제가 너무 죄송해요. 오빠가 미용실 홈페이지 폐쇄한다고
안내문구 올린 것 보시고 달려오신 거 알아요. 나중에 오빠 컨디션 회복되
시면 그동안의 일을 모두 말씀드릴게요.”
“그래, 고맙구나.”
“그런데 오빠, 집에서는 걱정하실 텐데요.”
“좀 전에 전화했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로마에 왔다고 했어. 한 삼일 정도
걸릴 거라고 했어.”
“아, 그러셨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간호사의 배려로 미연은 경수 곁에서 아침을 맞았다. 여명이 서서히 병실의
창문을 희뿌옇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연이의 손을 꼭 잡고 경수는 깊은 잠에
빠졌다.
회사에 팩스로 진단서를 보내고 일주일 휴가를 얻는 경수는 마음이 어느 때
보다 편안했다. 늦가을 오후의 햇살이 무척 따스했다. 경수를 휠체어에 앉히
고 미연이 뒤에서 밀고 병원 앞에 있는 연못으로 나왔다. 많은 환자들이 보호
자들과 연못 주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연못 위로
오리 두 쌍이 유유히 헤엄을 치며 만추의 서경(敍景)을 한층 더해 주었다. 노
랑색과 흰색 그리고 붉은색 국화 화분이 연못 주변을 빙 둘러가며 놓여 있는
데 은은한 국향(菊香)이 후각을 자극했다.
“오빠, 기억나세요?”
“…….”
“오빠, 예비고사보기 전날 제가 오빠에게 엿 드렸던 거요?”
“응? 그럼, 그거 기억 못하면 내가 아니지.”
“다행이네요.”
“그것이 저와 마지막이었죠? 그날이 후 25년 만에 오빠를 뵙네요.”
“그렇구나. 너무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어.”
“…….”
“그간 어떻게 된 거야? 왜, 통 연락이 없었어? 나 결혼 전까지 미연이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
“ 결혼하고 고향에 볼 일 보러 가끔 갈 때마다 미연네 집에 가보았지만
차마 미연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미연이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물을
수 없었어. 어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 그랬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
도 참으로 순진했던 것 같아.”
미연이는 경수를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나에게 그간의 일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지?”
“…….”
“미연아,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연이 수건을 꺼내 조용히 눈물
을 닦았다.
“오빠, 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오빠와 함께 있는 것으로
저는 만족해요. 옛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나는 걸요.”
“아냐, 그래도 어떻게 미연이와 내가 25년간 서로의 소식조차 모르게 살아야
했는지 무척 궁금해.”
“오빠-.”
“미연아, 괜찮아 무슨 이야기라도 상관없어. 그동안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많을
텐데......”
“오빠.”
미연이 다시 수건을 꺼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경수가 미연이 손에
있던 손수건을 빼서 미연이의 촉촉하게 젖은 볼을 닦아 주었다.
“오빠,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으시면 절대로 안
돼요. 아셨죠?”
“이제 다 지난 이야기인데 이제 새삼 증오해서 무엇하겠니?”
“전, 지금도 오빠를 사랑해요. 제 마음은 절대로 변함이 없어요. 어느 날 가을에
는 너무 오빠가 보고 싶어서. 오빠가 다니시는 S물산에도 수십 번도 더 갔었어
요.”
‘아, 미연이 이미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왔으면 나를 만나지 않고 왜 그냥 갔어? 바보같이…….”
“그러나 차마 오빠를 볼 수 없었어요.”
“저런, 저런.”
미연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그때 운동장만한 하얀 뭉게구름이 남
녘으로 서서히 움직이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빠-.”
“응, 그래. 말해봐. 무엇이든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 있으면 다 해봐.”
저, 저 오빠 예비고사 보는 날 저녁 오빠 어머니 만났어요.“
“우리 어머니를?”
“네에. 그날 저녁 늦게 저를 보시자고 했어요.”
경수는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을 떠 올렸다. 어머니는 한국 전쟁 때
남매를 데리고 피란을 가다가 우미기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장돌뱅이로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호구지책으로 우미기
에서 허술한 주점을 운영하였다.
당장 남매와 먹고 살길이 없었다. 얼굴이 반반한 탓에 주점은 늘 동네 남자들
로 북적였다. 손님 중 유독 동네에서 점잖고 말 수가 적으며 도회지에서 공부
를 하고 말쑥한 차림의 미연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 친했었다. 그러던 중
전쟁 통에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10년 만에 어머니
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한 쪽 다리를 잃은 상태였다. 늘 뒷방에 묻혀 술로 세상을 살았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와 남매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경수가
태어났고, 이년 뒤 건너 마을에서 미연이 태어났다. 어머니의 주점은 멀리
까지 소문이 나서 근동의 한량이라고 자처하는 남정네들이 몰려들었다. 어떤
겨울날은 손님들이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어머니는 손님들 시중을 드느라 함
께 밤을 지새워야 했다. 또 어떤날은 어머니가 미연이 아버지와 단 둘이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동네에서는 은밀히 미연이 아버지와 경수 엄마가 바람이 났다고 소문이 나
기도 했다. 아버지는 동네 남정네들과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는 어머니 행동
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지만 불구의 몸으로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자신의
신세를 탓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연이 아버지는 농번기를 빼고 거의 매일 어머니의 주점에서 살다시피 했
다. 어머니는 그런 미연이 아버지를 온갖 정성을 다해 최고의 손님으로 모셨다.
아버지는 불구의 몸으로 집을 나가곤 했다. 나가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주점은 동네 여인들에게 철거대상이었지만 늘 남자들로 문전성시
를 이루었다. 수입도 괜찮은 편이어서 어머니는 삼남매를 경제적으로 넉넉하
게 해주었다.
경수가 예비고사를 보러 S시로 가는 날 늦은 밤에 경수의 어머니는 미연이를
불렀다. 경수에게 편지를 써서 남몰래 보내고 가슴이 콩닥거리던 미연이었다.
경수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진학을 위한 첫 관문을 위한 시험이라며 이틀 동안
주점을 임시 휴업하기로 했다. 마치 죄인이 된 것 처럼 미연은 주점으로 찾아
갔다.
“네가, 우리 경수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네가
나에게 이 시간 이후로 경수에게 편지를 쓰지 않는 다고 나에게 맹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너는 경수를 만나서는 안 돼. 그 이유는 묻지
말기 바란다. 너희들은 절대로 , 천지개벽하는 일이 있어도 사귀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경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연이 손을 잡고 애원하다 시피 했다. 갑작
스러운 경수 어머니의 행동에 놀란 것은 미연이었다. 어쩌면 먼 훗날 시어머
니가 될 수도 있는 경수 어머니였다.
“죄송해요.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오빠에게 제가 철없이 편지를 보
내고, 자주 만나시간을 빼앗았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로 편지를 보내지 않
을 테니 만나지 마시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발, 아주머니.”
“안 된다. 너희들은 절대로 만나서는 안 돼. 미연아, 내가 이렇게 빈다. 절대로
너희는 만나서 안 된다. 그리고 이건 그동안 네가 경수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너에게 돌려 줄 테니 우리 경수에게 미련을 버리거라.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미연아, 내 청을 들어주는 거지?”
“아주머니-.”
두 사람의 대화는 경수 어머니의 일방적인 강요로 끝나고 말았다. 경수 어
머니는 왜 경수를 만나면 안 되는지 정확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 경수를 만나
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경수가 예비고사를 치른 후 경수 어머니는 경수를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경수의 형에게 보냈다.
그곳에서 대학교 본고사를 위하여 학원에 다니도록 하였고 경수는 고향에
내려올 수 없었다. 경수가 K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고 난 뒤 경수 아버지가
객사하였다는 통보가 왔다. 경수 어머나는 20여년 가까이 운영하던 주점을
처분하고 동네를 떴다.
명목은 서울서 공부하고 있는 경수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라고 하였다.
경수 어머니는 G시장에서 아담한 식당을 열었다. 경수가 정당한 명분 없
이 우미기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한참 대학 입시를 위하여 열
심히 공부하고 있을 미연이를 그리워하며 속으로 삭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
무리 미연이에게 편지를 띄워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흑-. 미연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수는 참던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환자들이 경수와 미연이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동안 미연이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빠, 울지마세요. 안정을 되찾아야하는데 우시면 저 더 이상 이야기하
지 않을래요.”
미연이 경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미연아, 미안하구나.”
미연이 경수의 양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유심히 보니 비록 25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늘 보아 온 얼굴같았다.
“그래, 아이들은 몇이나 두었니?”
“오빠, 전, 전 아직 미혼이에요.”
“뭣, 뭐라고 했니?”
“아직 미혼이에요.”
“저, 정말이니?”
“네에, 그동안 선을 수백 번도 더 보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가지 않았어요.”
경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리를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왜? 세상에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수백 아니 수천 번이라도 선을 보고 시
집을 가야지. 왜 혼자 살아?”
“…….”
“지금 나에게 거짓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이들이 고등학교 학생 쯤 되었
지? 둘째는 중학교 학생일 테고…….”
“오빠, 정말이에요. 저 지금껏 혼자 살았어요.”
“아니, 왜 시집을 안 간 거야?”
“…….”
“미연아, 왜, 왜 아직도 시집을 안 간 거냐고? 벌써 중년의 나이가 되었는데.
바보같이 왜 혼자살어. 이 좋은 시절에 거리에 나가면 발에 채 이는 게 잘생긴
남자들인데. 바보같이…….”
“잘 생긴 남자들이 발에 채이면 무엇해요. 오빠 같은 남자가 없는데요.”
“이런, 이런 바보를 봤나? 너, 정말로 바보구나.”
경수는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고 시집을 가지 않은 미연이에게 미안한 생각
이 들었다. 그만 울컥하고 설음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소설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자신으로 인하여 펼쳐진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경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오빠, 이것 보세요.”
미연이 핸드백에서 편지 꾸러미를 꺼냈다.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아니, 이건, 이건 내가 25년 전 너에게 보낸 편지 아니니?”
“오빠, 반은 제가 보낸 편지에요.”
“반은?”
“오빠, 어머니께서 그날 밤 저에게 주신 편지들이에요. 전 모두 불에 태워
버리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태우지 못하고 지금까지 오빠와 저의 사랑의
결실로 여기고 고이 간직해 왔어요.”
“이런, 바보, 너 정말로 바보로구나.”
‘아, 내 그동안 무엇을 하였단 말이더냐? 미연이 지금까지 순수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수많은 밤을 외롭게 보냈을 터인데. 난, 나는 무엇을 하였더
란 말이냐?’
경수는 한번 맺은 인연의 무서움에 대하여 치를 떨었다. 요즘처럼 즉석에
서 눈이 맞으면 아무 죄의식 없이 몸을 섞는 세태에 비하여 반평생을 한 남자
에게 준 마음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미연이 바보 같으면서도 우직한 마음에
경수는 가슴이 아려왔다.
“오빠, 울지마세요. 이미 지난 일인 것을요. 기분전환 할 겸 오빠가 1982년
여름 어느날 저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를 한번 읽어 볼 테니 잘 들어 보세요.”
미연은 조용히 경수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늘밤이 칠월칠석이라 그런지 부슬부슬 밤비가 내리네요. 견우와
직녀의 눈물의 상봉이 마음을 아프게 하네요. 그대, 지금 저 빗소리를
듣고 있는지요?
어제 등교길에 그대의 뒷모습을 보고 하루 종일 가슴이 울렁거렸답
니다. 필연이 나와 그대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
답니다. 일 년을 두고 가슴을 졸이다 이렇게 무작정 펜을 들었습니다.
이 작은 가슴에 행복이라는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습니다. 그대와
함께 물을 주며 가꾸고 싶습니다. 행여, 그대에게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시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의 화답을 기대해 봅니다.
- 경수 -
“내가,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었다니. 정말로 신기하구나.”
“오빤, 그때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어요. 잘 생긴 외모에 공부도 잘
하셔서 읍내에서 어떤 여학생이라도 오빠를 선망했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나 인기가 많았어?”
“그럼요. 오빠가 그때는 읍내에서 최고였어요.”
우울했던 분위기가 25년 전 편지 한통으로 인하여 금방 밝아졌다.
“이번에는 미연이 편지를 내가 읽어 볼까?”
경수가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 중 핑크색 편지를 집어 들었다. 1982년 10월
중순 경 경수에게 보낸 편지였다.
오빠, 사랑해요.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련하게나마 알 것도 같아요. 오늘
역전에서 오빠를 보고 무척 반가웠어요. 옆에 친구들 때문에 무른 척
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아팠어요. 고3이라고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
요. 건강도 살피시면서 공부를 하셔야 해요. 오늘 저는 저 달님께 오
빠가 좋은 점수로 예비고사를 무난히 치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었
어요. 저의 꿈은 오빠와 같이서울서 대학에 다니는 거예요. 오빠와 창
경원에도 가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싶어요. 저는 영문과를 갈거에요.
오빠,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참고 기다릴거에요. 안녕.
- 오빠를 사랑하는 미연이가 -
경수는 삼일 만에 퇴원하였다. 미연이는 정성을 다해 경수의 병간호를 하
였다. 삼일동안 두 사람은 해 묵은 오해를 풀었고, 마치 다하지 못한 사랑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늘 붙어있으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막상 병원
에서 퇴원하였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냥 헤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노처녀 혼자 사는 집에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빠.”
“응?”
“우리, 여행가요?”
“여행?”
“네에, 둘만의 여행. 25년 만에 떠나는 오빠와 나만의 여행이요. 부산이 늘
가고 싶었거든요. 저 여태껏 한 번도 부산엘 가보지 못했어요.”
“그래, 떠나자.”
막상 여행가자고 승낙은 했지만 경수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
에게 미안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에게 배신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우울
했다.
‘그래, 이틀 동안 세상 일을 잊어보자.’
두 사람의 여행은 신혼여행처럼 달콤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경을 하였고,
아무리 세상일을 잊자고 하였지만 자꾸만 아내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늦은 오
후 경수는 미연이와 가까운 카페를 찾았다. 브랜디 한 병을 시키자마자 경수는
단숨에 스트레이트로 세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빠, 컨디션도 안 좋은데 웬 술을 그리 급하게 마시세요?”
“응, 마셔야 할 것 같아. 마시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으니 마셔야 해.”
“오빠-.”
‘아아아아, 어머니. 일이 이렇게 꼬인 것이 당신 때문이라니요? 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어머니 당신께서 무슨 연유로 그리하셨는지요?’
금방 40%가 넘는 브랜디 한 병이 바닥을 보였다.
“오빠, 저도 마실래요. 저도 오늘밤은 실컷 마시고 싶어요. 술을 마시다 죽
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마실래요.”
“여기, 헤네시 700밀리 한 병 더 주세요.”
미연이와 경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빈속에 브랜디 네 병을 비웠다. 독주
네 병을 순식간에 마신 경수는 천정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땅바닥이 파도를
친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피웠지만 쓰기만 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왜, 왜 미연이가 나를 만나면 안 된다고 했을까? 왜? 왜?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안 나와. 왜 그리 말씀하신 걸까? 그래, 어머니가 미
연이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겠지. 어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는 분이셨어. 나를 만나지 말라고 하셨다면 분
명히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거야. 과연 그 피치 못할 사연이란 게 도대
체 무엇이냐고? 도대체 무엇이냐고?’
“오빠아-, 십일전 미용실에 오셨다 왜 그냥 가셨어요?”
“…….”
“오빠, 왜 그냥 가셨느냐고요?”
“막상 너를 보니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어. 무척 반가우면서도.”
“그래서, 영영 저를 안 보시려고 하셨어요?”
“아, 아니야. 그건…….”
미연이 약간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서운한 감정을 토했다. 경수가 술 취한
미연이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눈매와 콧날이 자신과 너무나 비
슷했다.
‘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 수가? 그래서, 그래서 어머니가 미연
이에게 그런 말씀을…….’
경수는 하늘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파도가 자신을 집어 삼킬 거라고 판단하고
얼른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오, 오빠, 왜 그러세요?”
“아냐, 파도가 너무 무서워서 그래. 배가 뒤집힐 것 같아.”
“…….”
“오빠, 여긴 카페에요. 바다가 아니라고요.”
미연이 경수 자리로 옮겨와 경수를 일으켜서 소파에 앉게 했다.
“미연아, 우리 이대로 헤어지자. 난, 자신이 없어. 우린 이대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각자 집으로 말이야.”
“오빠, 갑자기 무슨 말씀 하시는 거 에요? 이대로 헤어지자뇨?”
“내가, 너를 찾아간 것이 잘못되었어. 우린 요 며칠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우린 이대로 헤어져야 해. 알았지.”
“안돼요. 절대로 안 돼요. 난, 이제 어쩌라고요? 안 돼요.”
“바보, 우리는 바보야. 나이만 먹었지. 정말로 바보들이라고. 이젠 예전에 각
자의 위치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야 돼.”
“안돼요. 오빠, 전 죽어도 오빠와 헤어질 수 없어요. 절대로요.”
미연이 소리 내어 통곡하자 카페의 종업원들은 두 사람의 행동에 신경을 쓰
면서 다른 손님들의 신경을 건드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 끝 -
그 동안 제 작품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如如하시고 즐거운 나날 되소서.
여강 최재효 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