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몽(3)
상사몽(3)
- 여강 최재효
덕중은 왕의 여인이었지만 왕으로부터 총애를 잃자 궁녀들과 내시들에게 은연중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다른 전각에 배속된 몇몇 궁녀들과 내시들이 덕중의 처소에 놀러와 스스럼없이 다과를 즐기고 덕중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내명부 정3품 소용에서 하루아침에 궁녀의 최하위 직급인 방자로 전락한 덕중의 처지를 마치 자신의 일 인양 덕중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궁녀들도 많았다.
그중에 환관 최호(崔湖)와 김중호(金仲湖)는 덕중과 막역한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덕중이 우울해하거나 몸이 안 좋을 때면 두 환관은 다과와 술을 얻어와 덕중과 함께 마시기도 할 정도였다. 봄비 내리는 어느 날 저녁 적적한 덕중이 술상을 준비하여 두 환관을 자신의 처소로 들게 하였다.
“마마님, 고맙습니다. 저희들같은 고자들을 다 불러주시다니요?”
“마마가 아니에요. 제 직급이 방자인 것을요.”
“아닙니다. 상감마마께서 언제 다시 마마님을 은애하실지 누가 알아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향기 가시고 시든 꽃을 상감이 어찌 찾으시겠어요.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술이나 마시며 죽은 듯 살아야지요.”
“마마님, 너무 아까워요. 마마님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기셨는데 시들다니요? 소신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아침이슬 머금은 한 송이 도화(桃花)랍니다.”
환관 김중호가 덕중의 눈치를 보며 아첨을 하였다.
“제가 아무리 천한 방자의 신분이 되었지만 놀리시면 싫어요.”
“아닙니다. 마마님은 정말로 아름다운 한 떨기 화초이십니다. 만약 제가 나비라면 아침저녁으로 마마님에게 달라붙어 꿀을 빨아댈 것입니다.”
“어머나? 점점 놀리시기에요?”
내시 최호의 아첨성 발언에 덕중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한잔 두잔 술이 점점 더해지자 덕중은 은연중 자신의 속내를 두 내시에게 내비쳤다.
만산이 만화방창하건만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네. 여인네
마음을 훔쳐간 야속한 임은 영영 가버린 것이지, 어떤 여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이면 거을만 바라본다네. 아아, 야속타
어찌 한 하늘 아래 어떤 여인은 웃고 또 어떤 여인은 눈물로 밤을
지새야 한단 말인가.
“마마님,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상감께서는 본래 마음이 단단하시지 못하십니다.
할 수 없이 많은 신하들을 죽이는 처분을 내리시긴 했지만 상감마마는 눈물이 많은 분이라 들었습니다. 마마님께서 더 잘 아실 거 아닙니까?”
덕중은 잠저에 있을 때 자주 상감의 부름을 받았었고 그러면서 자연 수양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잠저에 있을 때 수양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에 관련된 일처리에 대하여는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마마님, 요즘 너무 열심히 일하시고 근신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대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저희 내관들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요.”
“그래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외면만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꽃이 활짝 피었지만 벌 나비가 찾지 않으니 뭐가 보기 좋단 말씀이세요?”
“마마님, 그럼 벌 나비를 잡아 올까요?”
김중호가 덕중의 의향을 은근히 떠 보았다. 덕중은 지난번 자신의 마음을 훔쳐갔던 내시 송중을 떠올렸다.
‘나쁜 자식 사내가 되서 고자질이나 하다니. 내 또 그런 자를 만나게 될까 두렵구나.
그러나 나의 이 외로움은 역시 사내의 억센 뚝심과 땀 냄새가 있어야 해결할 수 있거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 귀성군에게 내 마음을 전달해 보는 거야. 귀성군이라면 송중이 놈처럼 비겁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대군의 잠저에 있을 때 자주 마주치면서 충분히 얼굴을 익혔고 그는 나에게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
덕중은 상감의 발길이 끊어진 뒤부터 귀성군 이준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 여자보다 고운 뽀얀 피부, 붉은 입술과 아름다운 목소리 덕중은 기억에 남아있는 귀성군 이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죄를 짓고 근신 중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날로 더해가는 음욕의 갈증을 해소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만일 귀성군을 만난다면 상감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연도 전해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러나 귀성군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마마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세요? 소인들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도와드릴 터이니 말씀하세요.”
내시 최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덕중을 바라보았다.
“저어-”
“......”
“마마님, 말씀해 보세요. 저희는 이미 마마님과 한 편인걸요. 그러니 심중에 있는 어떤 말씀이든 해보세요.”
“저어, 혹시 귀성군이 요즘 대궐에 자주 오세요?”
“귀성군? 아아, 임영대군의 둘째 자제분이신 귀성군 이준님이요?”
김중호가 덕중의 마음을 헤아린 듯 귀성군에 대한 근황을 늘어놓았다.
“마마님, 귀성군 이준님에 대한 상감마마의 총애는 하늘을 찌를 듯 하답니다. 상감마마의 동생이신 임영대군께서 입궐하실 때마다 귀성군을 대동하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상감께서는 귀성군에게 장차 조선을 짊어지고 갈 하늘이 내린 동량지재라고 하셨답니다.”
“그럴 테지요. 상감께서 사저에 계실 때부터 귀성군을 예뻐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빼어난 외모하며 풍채 그리고 글 잘하고 말도 잘하시지요. 아마 장안에서 귀성군을 따를 사내가 없을 거에요.”
“마마님, 혹시 귀성군에게 연정을 품고 계신 거 아니에요?”
“어머나? 근신하고 있는 처지에 어찌 그런 망측한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제 눈은 못 속여요. 마마님께서 분명 귀성군을 연모하시고 계신 게 분명한 것 같은
데요?”
환관 최호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 덕중의 태도를 보고 덕중이 귀성군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마마님, 제가 귀성군을 한번 모셔올까요?”
“어떻게 그 분을 모셔올 수 있나요?”
덕중은 자신도 모르게 귀성군 이준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그러나 상감
으로부터 근신하라는 명이 있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마님, 편지 한통 써 주시면 소인이 귀성군에게 전해드리지요.”
“고맙지만 무어라 그 분에게 편지를 쓴단 말이에요.”
“그건 걱정 마세요. 최호 내관이 연애편지 쓰는데 는 뛰어난 솜씨가 있답니다.”
“그럼, 최내관께 부탁드릴게요. 제 마음을 그분에게 한 치의 빠짐도 없이 전하는 편지를 써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마마님께 거나하게 술 까지 얻어 마셨으니 그까짓 편지 한통쯤이야 얼마든지 써드리지요.”
간밤에 내린 비로 꽃이 만개하였지만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네
구중궁궐에 핀 해어화(解語花) 한 송이 임의 손길을 기다리지만
찾아오는 이는 오직 깊은 밤 달님뿐이라네. 궐 밖에 훤칠한 나비
한 마리 있다하여 여러 날을 잠 못 들고 꿈속을 헤매고 있네. 하늘
맑고 보름달 뜨거든 누가 해어화 한 송이 꺾어보려나
- 德重 -
“과연, 과연 최내관은 명문이옵니다. 정이 많은 사내라면 이 편지 받아보고 그냥
있지않을테지요. 고맙습니다.”
덕중은 연서의 내용을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
“그런데 이 서신을 누가 귀성군에게 전하지요?”
“마마님,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귀성군과 인사 정도는 나누고 있는 처지이고
귀성군 역시 자주 입궐하는지라 제가 적당한 때를 보아서 전해드리지요.”
“어머나 고맙기도 하셔라. 그리해주신다면 나중에 크게 한턱 쓰리다.“
어느날 조회를 마치고 임영군과 함께 대전에서 나오던 귀성군 이준은 환관
최호로 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고 깜짝 놀랐다.
‘덕중마마님이 나를 초대하는 내용 아닌가? 먼젓번 송중과의 일로 대궐을
벌컥 뒤집어 놓고 근신중이신데 나에게 이런 연서를 보내다니. 이일을 어찌한다?’
귀성군 이준(李浚)은 잠시 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덕중을 생각했다.
수양대군이 잠저에 있을 때 은밀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준의 아버지인
수양의 아우인 임영대군 역시 수양과 뜻이 맞아 자주 수양을 잠저를 찾게 되었고
그때마다 둘째 아들인 귀성군을 대동하였다. 수양의 여인이 되기 전부터 덕중과
귀성군은 자주 마주치면서 자연히 인사정도는 하는 사이가 되었고, 덕중이 수양의
여인이 된 뒤로 부터는 귀성군은 덕중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어 대하였다.
어쩌다 두 사람이 마주치면 덕중은 얼굴이 빨개지고 귀성군 역시 어쩔 줄 몰라 했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비슷하였고 한참 이성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때였다. 어색한
자리가 생길 때마다 덕중이 재치 있는 말솜씨로 풀어나가자 귀성군은 덕중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비록 나이가 비슷한 덕중이지만 큰 아버지인 수양대군의 첩실이니
자신에게는 큰어머니뻘 되는 처지였다.
“귀성군은 정말로 멋진 분이세요. 내가 대군의 여인이 아니라면 귀성군을 흠모하였을거에요.”
언제가 덕중이 자신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아, 어쩐다.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근신중인 여인을 찾아갈 수도 없으니.
만약 이 일이 상감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나는 잘못하면 그동안 상감에게 받은 총애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덕중이 후일 신분을 회복하고 다시 상감의 총애를 받는
날에는 나의 처지가 곤란하게 될 것이다. 아아, 이일을 어찌한다. 보름달 뜨는
날이라면 내일인데......’
귀성군 이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가 되어 여인의 초대를 모른 체 할 수도 없어 딱 한번만 덕중을 만나 보기로 하였다. 귀성군은 환관 최호에게 보름달이 뜰 때 덕중을 찾겠다고 답을 주었다.
“그래요? 정말이지요?”
“그럼요, 마마님.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고마워요. 최내관. 내 그대의 은혜는 나중에 꼭 갚으리다.”
‘아아, 꿈에 그리던 귀성군 이준을 만나게 되었구나. 그 잘난 사내를 품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기분이 크게 고무된 덕중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음날 다른 궁녀들에게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처소로 돌아온 덕중은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뒤 향이 강한 화장품으로 단장을 하였다. 아무리 방자로 전락 된 몸이라 해도 한때 상감의 성은을 입고 총애를 받던 몸이라 궁녀들은 덕중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무수리들에게 오늘 귀성군이 올 예정이니 정갈한 주안상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임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더디게 지나가고 있었다. 몸이 달아오른 덕중은 경대를 붙잡고 있었다. 연지를 바르고 화장을 예쁘게 한 뒤 그동안 입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당의(唐衣)를 꺼내 입었다. 치마 끝을 살짝 들어 올려 마치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인의 의도를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차림이었다. 옥색 삼회장저고리에 남색치마 진초록의 당의를 걸친 덕중은 소용의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춘 삼월, 해가 넘어가자 곧 만월이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을 환하게 비추었다. 약간 어둑어둑 해진 시각 한 사내가 덕중이 머무는 처소로 접근했다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피더니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대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궁녀 한명이 얼른 사내를 문안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어서 오세요. 귀성군 나리. 마마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마마님?’
귀성군이 왔다는 소리에 덕중은 마루로 뛰어나왔다.
“귀성군 나리, 어서 오세요.”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상감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소첩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 소용의 직책에서 폐위된 여인이 당의에 큰머리까지 하고 있다니?’
귀성군은 덕중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당연히 최하위 무수리 수준의 방자의 신분으로서 비빈들이 입는 복식을 갖추고 있는 덕중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귀성군 나리, 어서 방으로 드세요.”
“말씀 낮추세요. 그냥 귀성군이라 불러주세요.”
“그래도 어찌 방자가 ......”
방안에 들어선 귀성군은 푸짐하게 차려진 주안상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랬다. 도대체 방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진수성찬을 준비할 수 있는지 덕중의 능력에 속으로 감탄했다.
“상감을 따라 잠저에서 입궐한 뒤로 귀성군을 처음 가까이 대면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감개무량합니다.”
“그동안 자주 마마님을 찾고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불충했습니다.”
귀성군은 방자의 처지로 강등된 덕중에게 예를 갖추어 깍듯하게 대했다.
“귀성군 나리를 오시라고 한 것은 나의 처지를 비관하여 누구를 원망하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가까이서 귀성군 나리를 모시고 술이나 한잔 하고 싶어서 오시라 했습니다.
불쌍한 여인의 청을 물리치지 마세요.”
“......”
“자, 귀성군 나리,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자작합지요.”
귀성군은 궁녀의 최하위 직급으로 떨어진 덕중이지만 한때는 상감의 총애를 입었던 여인인지라 거북하기만 했다.
“자, 이 여인의 잔도 받아 주세요.”
“고맙습니다.”
한잔 두잔 서너 잔이 돌자 귀성군은 경계를 풀고 안심하였다. 이준은 한때 상감의 여인이었던 덕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 아직도 미모는 그대로구나. 이런 여인이 이런 대궐 한편에서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시들어가다니. 참으로 안 된 일이로구나. 내 상감의 여인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한번 해보겠건만......’
“아이, 귀성군 나리. 무얼 그리 보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참으로 고우십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마님은 미색은 변함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행복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행복한걸요?”
덕중은 쉴 새 없이 귀성군 잔에 술을 따르고 귀성군은 술과 아름다운 여인의 체취에 취해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덕중이 은연중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이야기를 하자 귀성군은 임금에게 덕중의 처지를 잘 말씀드려 보겠다고 하였다.
“고마워요. 내가 다시 상감의 성은을 입으면 귀성군의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마마님, 마마님처럼 고우신 분이 이런 구중심처에 시들어 간다는 것은 정말로 억울한 일이옵니다. 제가 상감마마를 독대하는 날이 있으면 꼭 마마님의 복위를 위하여 말씀 올리겠습니다.”
“귀성군 고마워요. 이 은혜 저승에 가더라도 결코 있지 않겠습니다.”
처음에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는 것은 예정 된 수순인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두 사람은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자 분별력을 잃은 덕중은 귀성군 곁으로 옮겨 앉더니 노골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내 이미 잠저에 있을 때부터 귀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불쌍하고 시들어 가는 여인에게 단비를 흠뻑 맞게 해주세요.”
“......”
덕중이 상반신을 귀성군에게 기대면서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귀성군 나리, 꽃이 시들어 떨어지기 전에 시원하게 단비 한번 내려주시어요. 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창밖에 나가 비를 맞고 싶지만 소첩, 이 방안에서 귀성군이 내리는 비를 맞고 싶답니다. 여인의 간청을 뿌리치지 마세요. 제발.”
덕중의 손이 귀성군의 볼을 어루만지고 뜨거운 입술을 가까이 대자 귀성군은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인의 강한 체취가 사내의 후각을 자극하였다. 덕중의 한 손이 귀성군의 가슴을 더듬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귀성군은 욕망을 억누르면서 자꾸 술잔을 입에 댔다. 불나비가 된 한 여인을 안아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상대는 한때 상감의 총애를 받던 여인이었다. 결코 따 먹을 수 없는 금단의 열매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을 경우 멸문지화를 당 할 수도 있는 아주 독성이 강한 열매인 것이다.
“제발, 제발 저를 꼭 안아주세요.”
“마마님, 이러시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 되옵니다. 오늘밤 소첩은 귀성군을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아아, 이일을 어찌하나. 야심한 시각에 대궐을 빠져 나갈 수도 없고 어찌한다?’
밖에서 무수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방안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억하느라 바빴다. 번개와 천둥이 대궐의 모든 전각들을 집어 삼킬 것 같았다. 밤새도록 천둥은 한양의 지축을 흔들어댔다. 새벽녘이 되자 천둥이 그치고 첫닭이 울었다. 귀성군은 초췌한 모습으로 간신히 덕중의 처소에서 빠져 나와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