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8. 8. 1. 21:26

 

 

 

                 

 

 

 

              

                                               


 

 

 

 

 

                                  사모곡(1)

 

 

                                                                                                                                                              - 여강 최재효

 

 

  

 

 엄동설한 신작로는 눈으로 뒤덮여 어디가 길이고 논밭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눈보라 칠 때마다 천지는 하나같아 보였다. 길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들이 길의 경계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전쟁

통이라 어쩌다 신작로를 달리는 것은 군용차 몇 대가 전부였다. 하루

종일 도로는 적막했다.


 “몸조심하시고 꼭 돌아 오셔야해요.” 
 이십 중반의 여인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내는 여인을 껴

안으며 여인의 등을 다독거렸다. 곁에 있던 또 다른 사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사내와 여인은 설경이 되어 서

있었다.


 “나 없는 동안 애들과 아버님 어머님 잘 부탁하오. 홀몸도 아닌

당신을 두고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가는 내 마음이 무척 아

프기만 하다오.”


 여인은 이제 전쟁터로 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흐느꼈다. 동네 청년 네 명이 군에 입대하고 넉 달 만에

전사통지서가 배달되자 마을은 큰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여인은 남편이 전장에 나가고 난 뒤 곧 있을 해산과 어린 두 딸들

이 걱정 되었다. 시집와 내리 딸만 넷을 낳자 여인은 시부모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나기 이년 전 조(趙)씨 성을 가진 집안의 여인은 해주

최씨 가문의 아홉 남매 중 여섯 번째인 막내아들과 혼인하였다. 결혼

과 동시에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서 점봉리로 분가한 부부는 가까

이 있는 부모로 터 많은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일제 때 장사를 해보겠다고 서울로 올라간 큰 아들은 얼마 안 되

어 물려 받은 재산을 몽땅 날려버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올

라간 둘째 아들은 경찰관이 되어 고향의 부모를 생각할 수 없는 처

지였다. 셋째 아들이 그동안 두 형들을 대신하여 많은 농사일을 도

맡아 해왔었다.


 여러 명의 일꾼을 두고 많은 농사일을 거들던 최씨 가문의 셋째 아

들마저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자 집안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었다. 누구보다 여인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자, 이제 들어가요.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 내가 전장에

나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

니 그리 알아요.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살아 돌아 올 테니 너

무 걱정하지 마오.”


 “형수, 너무 걱정 마오. 나와 함께 가는 길이니 내가 형님 잘 보살필

게요.”

 “재정이, 어서가세. 읍내까지 가려면 한참 걸어야 해.”


 여인은 두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남산만한 배를 어루만

지며 서 있었다. 눈보라가 더욱 거칠게 휘몰아쳤다.

 

  낭군이 전쟁터로 떠나고 얼마 안 돼 이번에는 중공군이 다시 서

울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인은 매일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했다. 중공군들은 인민군 보다 더 악랄하다고 했다. 신작

로에는 장호원 쪽으로 향하는 피란민들로 인산인해였다.


 1.4후퇴에 따른 피난민의 물결이 신작로를 메우고 있었다. 한동

안 뜸하던 포성이 점점 더 가까이 들리기 시작하자 시부모는 두 아

이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라고 했다. 그러나 어린 두 딸과 만

삭의 몸으로 엄동설한에 란길에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었다.


 “얘야, 아가. 더 늦기 전에 어서 피난길에 오르려무나. 집은 내가

잘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버님, 이런 몸으로 눈보라 속을 어떻게 헤쳐 나가요? 저 어린

것들을 데리고 길바닥에서 얼어 죽기라도 한다면 어쩌게요?”


 “빨갱이들이 다시 쳐 내려온다고 하는데 젊은 것들을 모두 죽인

다고 한단다. 그러니 빨갱이들 총에 죽느니 차라리 피난가다 얼어

죽을지언정 일단 떠나야 하지 않겠니?”
 ‘아아, 어쩌나?’


 여인은 시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시어머니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시누이와 일가친척들도 함께 피

난길에 올랐는데 집을 나서자마자 고통이 시작되었다. 장호원으로

가는 신작로는 발 디딜 틈 없이 피난민들로 북적였다.


 머리에 이불 보따리를 이고 두 딸을 앞세운 채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이틀 동안 쉬지도 못하고

걸어서 장호원 근처 쇠뚜리라는 곳에 거의 다 왔을 때 둘째 딸아이

가 그만 피난 대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재희야, 재희야. 어디 있니? 이 어린 것이 어디로 간 거야? 아

이고 얘야. 재희야.”


 가만히 서있어도 인파에 밀려 저절로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한나절을 헤매고 다닌 끝에 겨우 둘째 딸을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죄송해요.”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세상을 잘못 만난 게 죄지.”
 “엄마, 아버지는 언제 온대요?”


 여인은 아이들에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길을 걸으면서도 여인

은 남녘하늘 아래 어디쯤 있을 아이들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 여보, 잘 계신거지요? 아이들을 데리고 지금 남녘으로 향하

고 있답니다.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해야 할 지요. 끊임없이 들려오

는 포성이 이제는 자장가처럼 들린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

신지요?’


 “저는 아이들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도저히 만삭의

몸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아니, 올케 장호원까지 왔는데. 여기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곧 빨갱이들이 들이 닥칠 텐데.”


 “어머니, 그들도 사람인데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기야 하겠

어요? 저는 몸이 무거워 더 이상 이 상태로 눈보라 속을 걷는다는

것은 무리에요. 길바닥에서 애라도 나오면 어쩌게요?”


 여인의 말에 시어머니와 시누이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오랜시간 토론 끝에 시어머니와 여인은 집으로 되돌아가기로 하

고 시누이들과 두 아이들은 계속 피난길에 오르기로 했다.

  
 피난길에 오른 지 닷새 만에 돌아 온 막내며느리를 보자 시아버

지는 깜짝 놀랐다. 지금 쯤 대전 정도 가 있어야 할 며느리가 다시

돌아왔으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아가야, 피난가다 말고 다시 돌아오면 어쩌니? 동네에 코쟁이

군인들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젊은사람들을 끌어내 일을 시키고

하는데…….
 “아버님, 도저히 이런 몸 상태로 피난을 갈 수 없어요. 아이들은

시누이들과 계속 피난길에 올랐으니 걱정 마세요.”


 “이것아 지금 애들이 문제니? 젊은 아낙도 안심할 수 없는 형편

이야.”


 "할수없어요. 내 며칠 다녀보니 지옥이 따로 없습디다. 그냥 이 아

이가 집에서 몸을 풀도록 합시다."

 시어머니의 말에 시아버지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제는 미군들이 집으로 들이 닥쳐 아무도 없는 집 기둥을 도끼

로 내리 찍고 있는 것을 시아버지가 다른 땔감을 내어주고 겨우

말렸다고 했다. 하마터면 행랑채를 미군들에게 몽땅 땔감으로 내

줄 뻔했다.


 시어머니는 동네에 들어와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이 행여 젊은 며

느리에게 행패라도 부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만삭의 며느리를 집

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미군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큰 행패를 부리거나 피해를 주지 않

고 금방 동네에서 철수하였다. 아랫마을에서 군에 간 청년 세 명

이 또 전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 어쩌나 서방님은 무사 하신 걸까? 함께 간 삼촌과 무사

해야 할 텐…….
 간간히 뱃속에 아이가 발길질을 해댔다. 밤새도록 황학산 너

머로 포성이 들려왔다. 포성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아랫마을 시댁으로 내려가 시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올려야 했다. 연로한 분들이 젊은 며느리가 혼자

사는 집에 오는 것이 며느리 입장에서는 써 마음에 내키지 않았

다.


 겨울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빨래하고 밥하는 일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피난길에 오른 두 딸들과 시누이들이 장호원 근처

절간에 피신해 있다가 한달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소문에는 빨갱이들이 서울까지 내려왔다가 유엔군들의 반격으

로 북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한달만에  돌아 온 시누이들

과 두 딸들은 거지꼴이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양쪽 볼이 홀쭉했

고 감기가 들어 콜록거렸다.


 ‘아이고, 저 어린것들을 데리고 눈보라 속을 헤매고 다녔으

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꼬.’
 두 딸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보름동안 심한 감기증세로 고생을

해야 했고 그런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여인은 꼼짝할 수

없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