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8. 7. 6. 23:09

 












                            

 

 

                   

  

 


         e 커플(3)

 


                                                                                                                                                                                               - 여강 최재효

 

 

 

 


  연주가 강화도로 휴양 온지 두 달째 접어들었다. 아침 늦게 일어나 바닷가를 산책하고 들어와 혼자 아침 드는 것이 일상화 되다시피 하였다. 낮에는 주로 집안에서 인터넷 웹서핑을 하거나 그동안 읽지 못한 무협지나 세계명작들을 주로 보면서 낮잠을 즐기는 것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채웠다. 밤이면 별빛이 너무 곱고 낮게 내려와 연주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 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남편의 후배는 연주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하였다. 식사 시중은 물론 심지어 연주의 속옷까지 가져다 세탁을 하는 등 제3자가 보았을 때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연주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동안 연주의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주말마다 강화도로 와서 연주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다.


 남편과 남편 후배 그리고 주변의 연주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이 마치 연주를 즐겁게 하거나 위로해 주기 위하여 각본에 맞춰 무대 위에 올라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호동왕자로부터 하루 세 번 정확한 시간에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배달되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호동왕자의 편지 내용이 이상했다. 편지에 외로움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처럼 쓸쓸했다.


 옆 동네 산다면 원칙을 어기고 살며시 찾아가 어떤 연유인지 알아보고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연주에게 호동왕자는 하늘에 고고히 빛나는 달 같은 존재였다. 이승에서는 전혀 얼굴을 볼 수도 만나서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연주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왕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요즘 밤마다 술을 가까이 대하면서 자주 외롭다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니 말이야? 외롭기는 내가 더 외로운데.’ 


  연주는 바닷가를 돌아보겠다며 나갔다. 석양이 막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거대하고 붉은 쟁반이 부글부글 끓는 물속으로 서서히 잠기는 모습에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러댔다. 


  “어머나, 고아라. 정말로 장관이네. 배를 타고 저 멀리 바닷가에서 보면 더욱 멋질 텐데…….”


  [왕자님, 마치 꿈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저 석양 좀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고 처절한지요? 저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당신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먼 훗날 저승에서도 해가 뜨고 진다면 그때나 함께 석양을 봐야겠지요. 지금 디지털 카메라로 석양의 모습을 서너 컷 찍었어요. 이메일에 첨부하여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다음에는 저의 모습도 석양을 배경으로 하여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내 사랑 호동왕자님,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행복입니다. 어젯밤 꿈속에서는 얼마나 왕자님이 보고 싶었는지 무작정 배를 타고 저 바다를 항해하였답니다. 가다가 풍랑을 만나 다시 되돌아 오긴 했지만 오늘 밤에도 왕자님을 보러 항해를 하려해요. 안녕, 내 사랑 호동왕자님. 답장 금방 주실 거죠?]


  저녁 식사를 막 마치고 나자 남편의 후배는 일 년 전에 담근 것이라며 2홉들이 소주병에 더덕 술을 가득 담아 광어회와 함께 가져왔다. 석양의 경이로운 모습을 목격하고 돌아와 칼칼한 목을 밥 보다 쌉쌀한 동동주나 시원한 생맥주로 달래주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런 영어(囹圄)의 생활을 해야 하나. 몸이 예전보다 많이 개운해지고 편두통도 사라져서 일상생활하기에는 이제 괜찮을 것 같은데. 남편은 내가 이곳에서 오래도록 있기를 원하는 걸까?’


  연주는 더덕술 한 병이 좀 모자란 듯해서 이틀 전 두잔 정도 마시다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발렌타인 21년산 한 병을 꺼내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 따라 술이 식혜처럼 달콤했다. 해는 이미 바다속 깊이 사라진 듯 바닷물은 겨우 금빛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주는 마치 자신도 바다 속으로 사라진 해와 같다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세상 사람들은 해를 우러러 보면서도 햇살은 피해 다닌다.


  오랜 세월 교직에서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성(城)을 쌓아 타인이 절대 넘볼 수 없는 성역을 만들어 놓고 성주가 되었었다.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켜 놓은 것은 남편도 아니고 호동왕자도 아니었으며 주변의 동료들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높은 담장을 쌓고 타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한 결과가 오늘 자신이 멀리 강화도에 오게 된 까닭이라고 연주는 혼자 속으로 수긍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쩌면 나는 세상 사람들과 격리되어 비구니나 아니면 심마니처럼 일생을 살아가야 할 팔자인지도 모르지. 나의 깐깐한 성격에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동료교사들과 내 학급의 아이들은 지금 쯤 자유를 만끽하면서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을지도 몰라. 정말 그럴지도 몰라.’


  연주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혼자 웃다 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혼자 술을 마셨다. 발렌타인21 한 병이 바닥을 보였다. 더덕 주는 도수 높은 술을 부어 만든 것으로 1년 이상 숙성되자 알코올이 전통 소주 도수와 비슷했다. 연주의 위장은 거의 마비가 되었고 몸이 뇌의 지시에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했다. 겨우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에 접속하였다. 호동왕자가 보낸 이메일이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 빨리 답장 보내지 못해 미안하오. 나도 당신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몹시 궁금하다오. 하지만 당초 우리가 정한 계약을 깨면 안 되오. 어쩌면 나와 그대가 첫 만나는 순간 모든 환상은 서로의 격멸이나 후회 또는 충격으로 끝나고 말거요. 만남은 있어서 안돼요. 저승에 들어갈 때 까지 우리는 이렇게 현실의 저 너머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오.


 당신에게는 현실의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지 않소? 나 역시 그렇고. 오늘밤 일찍 잠자리에 들면 꿈속에서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를 맞을 준비를 해줘요.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지니도록 해요. 사랑해요 연주. 내 사랑. 영원히 사랑할거요.]


  ‘아, 내가 괜한 사랑을 시작한건 아닐까? 만나지도 볼 수도 없는 허깨비 같은 사랑 놀음이 다 무어란 말이냐? 어쩌다 처녀시절 연애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남편에게 발목이 잡혀 지금까지 한 남자만 알고 살아온 나의 지난 이력은 나를 애정결핍 환자로 만든 건 아닐까? 아아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연주는 병원과 남편 그리고 호동왕자가 짜고 자신을 영원히 세상에서 격리시키기 위한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변을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연주의 흐느낌은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연주에게 다가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던 연주는 이내 잠이든 듯 했다. 연주 남편의 후배가 연주의 콘도에 살며시 들어와 방문을 닫고 현관문을 살며시 닫아 주었다.


  새벽달이 바다 수면에 거의 닿을 쯤 이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연주가 기거하고 있는 콘도로 기어들었다. 술에 취한 연주는 현관문을 닫지 않은 채 잠이 든 상태였다. 달빛이 거의 없는 밤이지만 형체로 보아 남자가 틀림없었다. 연주가 잠든 콘도로 기어들었던 검은 그림자는 10분 쯤 콘도로부터 나왔는데 손에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콘도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콘도 주변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어디 갔지? 분명히 어제 빨래 줄에 널어놓았었는데. 이상하다.”
  다음날 정오가 다 되어 잠자리에서 일어난 연주는 사워를 하기위하여 속옷을 찾았다. 옷장속에 뿐만 아니라 분명 어제 저녁 베란다에 널어놓았던 팬티와 브래지어가 모두 사라졌다. 연주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어젯밤 호동왕자님이 나를 만나러 왔다가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속옷만 가져가셨나? 그럼, 왕자님이 변태기질이 있다는 것인데. 설마 그럴 리가 있으려고.’
  연주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