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커플(2)
E 커플(2)
- 여강 최재효
사모님, 오랜 스트레스로 인하여 뇌에 큰 부담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뇌에는 불안과 초조를 나타내는 물질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 두 물질의 조화 여부에 따라 불안이나 진정효과가 나타나지요. 가장 흔한 정신장애 가운데 하나인 불안장애나 불안과 우울, 공포 등을 동반한 공황장애는 이러한 진정, 항불안 신경계의 장애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사모님의 경우 이 신경계의 조절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인간의 문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찬란히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가진 무한대의 자유의지와 행동을 적절히 제한하고, 억제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제한이나 억제, 제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뇌속의 가바(GABA) 신경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 뇌에는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자극하는 신경계와 이를 통제하려고 하는 신경계가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마음과 신체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모님의 경우 오랜 직장생활에서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너무 신경을 쓴 탓에 신경이 많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뇌경색의 조짐도 있었으나 다행히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사모님의 병을 고치는 방법은 당장 내일부터 한적한 곳에서 요양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더 늦으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릅니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일주일치 약을 받아 병원에서 나온 연주는 머릿속에 헝클어진 실타래가 박혀있는 것 같았다. 당장 요양을 떠나라는 의사의 말은 복잡한 도시에서 떠나 한 동안 문명과 단절된 곳에 들어앉아 머릿속을 맑게 하라는 주문이었으나 막막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의 처방에 대하여 그대로 전했다. 남편은 강화도에 후배가 소유하고 있다는 별장을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 이럴 때 호동왕자님이랑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연주는 출판사 편집장으로 근무하는 대학동창 영미를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면서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영미는 고개를 갸웃 뚱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에는 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혹시 잘 아는 사람이 놀리기 위하여 일부러 접근해 그런 엉뚱한 수작을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주는 영미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환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여보, 대학 후배가 운영하는 콘도가 있는데 육개월 정도 예약했거든 내일 모레쯤 떠나도록 해요. 공기도 맑고 경치도 참 좋다고 하니 당신이 심신으로 복잡한 것을 훌훌 털고 요양하기에 참 알맞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참, 당신 거기 있으면서 심심할 테니 노트북은 가져가요. 아이들은 내가 챙겨서 학교에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남편은 연주에게 사전에 묻지도 않고 연주의 요양을 결정해 버렸다. 두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연주는 엄마로서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예전 같으면 학교 숙제나 준비물을 일일이 챙겨야 했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신들의 숙제를 챙기기 시작하자 한편으로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으나 마음이 편했다.
남편의 일방적인 지시는 연주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의사의 강력한 권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의사의 권유를 계속 무시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 이번 만은 모른 체하고 두 남자의 권유와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남편이 대신 연주의 학교에 휴직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마치 연주가 얼른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남편은 연주의 요양과 관련된 일들을 순식간에 처리하였다.
이틀후 남편은 오후에 회사에서 일찍 퇴근하고 연주와 함께 강화도로 향했다. 준비물은 간단한 화장도구와 옷 가방 몇 개가 전부였다. 서울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콘도는 동화에 나오는 집처럼 서양풍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는데 서너 채의 콘도가 마치 오누이들처럼 산을 배경으로 아기자기했다. 쾌청한 날이면 바닷속으로 지는 석양을 촬영하기 위하여 많은 사진동호회원들이 몰려들 정도로 경치가 뛰어 났다.
연주 남편은 콘도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연주의 노트북을 인터넷에 연결해
놓았다. 주말마다 남편은 병원에서 약을 타서 아이들과 함께 오겠다고 했다. 문명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하라고 하면서도 남편은 왜 컴퓨터에 신경을 쓰는지 연주는 의아했다.
“형수님, 제가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뭐 불편한 거라도 있으면 집사람에게
말씀하세요.”
“네에. 고마워요. 시설이 너무 잘 갖춰져 있어서 별로 불편할 게 없을 것 같네요.
암튼 신경 써줘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기 한 달간 머물면 비용이 얼마나 되나요?"
“아이, 형수님도. 그런 건 걱정하지마세요. 선배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고 했어요.”
“그래도 알고 싶어요.”
“형수님, 그냥 내 집이려니 생각하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계시면 되요.”
“네에, 알겠어요. 그리고 여기서 시내까지 나가려면 어떻게 가야해요?”
남편 후배는 정원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승용차를 순간 쳐다보았다.
“시내에 나가 실 일 있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릴 테니 말씀하세요.”
“가끔은 저 혼자 나가고 싶을 때가 생길 것도 같아요.”
“저 앞 마을까지 걸어가면 시내까지 가는 버스가 자주 있습니다.”
“네에. 잘 알겠어요. 고마워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마치 남편은 의사의 소견을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서둘러 이곳에 데리고 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심신의 휴양을 위하여
있으라고 하니 말이야. 혹시 나 말고 서울에 여자가 있는 게 아닐까?’
[왕자님, 저 강화도에 유배 왔어요. 의사가 장기간의 문명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야 한데요. 그렇지 않으면 건강이 악화되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면서 저를 협박하는 거예요. 오늘 남편은 저를 이곳에 데려다 주었어요. 남편 대학교 후배가 운영하는 콘도촌인데 경치가 뛰어나게 좋네요. 탁 트인 시야에 온통 바다 뿐 이네요. 오늘 하루 잘 지내셨는지요?
아, 지금 막 일몰이 시작되었어요. 내일은 카메라로 바다로 사라지는 석양을 찍어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석양이 이리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우면서 처절한 줄 미처 몰랐어요. 한편의 서정시가 저절로 써질 것같아요. 왕자님의 행복을 위하여 연주는 두 손 모아 기도 올릴게요. 안녕 - 당신의 처로부터]
연주가 이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5분도 안되어 호동왕자로부터 편지가 왔다. 하루 종일 연주의 소식만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호동왕자의 답장은 애절했다.
[오오, 당신으로부터 편지가 없어 몹시 불안했어요. 혹시 병원 갔던 일이 잘못
되었나 싶어 어젯밤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답니다. 연주, 어디 잘못된 것은 아니죠? 오늘도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면서 당신을 생각했어요. 평소에 믿지도 않던 하나님을 찾고, 부처님을 찾으며 당신에게 아무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받고 이제 안심이 됩니다. 이왕 강화도로 휴양을 갔으니 세상일을 모두 잊고 지내도록 해요. 나도 당분간 당신에게 편지 보내는 일을 쉴게요. 일주일에 한번만 안부를 물어도 되겠지요?]
연주는 눈앞이 캄캄했다. 절해고도 같은 곳에 홀로 떨어져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일주일에 한번만 편지를 주겠다니 나머지 6일은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할지 막막했다.
[왕자님, 안돼요. 나에게 있어 당신은 내가 살아야할 존재의 이유인 것을요.
그런데 저를 생각하셔서 일주일에 한번만 편지를 주시겠다는 것은 제가 살아
가야할 이유를 희석시키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아니 하루 종일 왕자님
체취를 느끼고 싶어요.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저에게 편지를 주셔야해요. 심신이 피폐해진 여인이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면서 무얼 하겠어요. 상큼하고 시원한 아침 이슬 같은 왕자님의 소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안이 되는 복음 같은 것을요. 하루에 꼭 한번만은 소식을 띄우셔야 해요. 아셨죠? 사랑해요 왕자님.]
멀리 바다가 이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이승의 하늘을 여행하면서 해는 이 풍진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온갖 잡념을 바다에 집어넣고 태우고 있었다. 거기에는 연주의 잡념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저 붉은 바닷물에 풍덩 빠졌다 나오면 나도 빨갛게 염색이 되겠지. 지나 세월이
흑백논리에 갇혀서 지루한 나날들이었다면 과감히 저 바닷물에 세탁을 하고
싶어. 내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옷을 아주 빨갛게 물들여 입고 싶어.’
향긋한 산바람이 연주의 코끝을 간질였다. 남편 후배가 갓 잡아 올린 광어회
한 접시를 가져왔다. 자신이 직접 잡은 것인데 맛이 기막히다고 하면서 연주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않고 돌아섰다.
“저기요. 안주감만 가져다주시면 어떻게 해요.”
“네에?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잠간 기다리세요.
형수님.”
사내는 얼른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가져와 연주에게 따라 건넸다.
“형수님,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술 드셔도 괜찮겠어요?”
“저요? 멀쩡해요. 보세요. 이렇게 소주도 원샷하잖아요.”
“…….”
“걱정하지 마세요. 저 주량이 소주 두병은 되거든요. 사장님이 안주만 가져다
주시니 술 생각이 나잖아요.”
연주는 남편 후배와 주거니 받거니 소주 세병을 마시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초승달이 중천에서 서천을 향해 항해하고 있는 모습이 연주의
눈에 들어왔다. 도심에서는 일 년에 한두 볼까 말까하는 초승달이었다. 그런
초승달이 연주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