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8. 5. 26. 23:00

 

 










                            

 

 

 

 

 

                      e  커플(1)

 

 

 

 

 

                                                                                                                                                                                                  - 여강 최재효

 

 

  골초들에게 니코틴 기운이 다하면 금단현상이 오듯 연주는 남편과 아이들이 회사와 학교를 간 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괜히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거실에 켜진 컴퓨터는 아무 반응이 없다. 연주는 그런 컴퓨터가 마치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히스테리컬한 노인 같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냈지만 전화번호를 알 지 못했다. 매일 아침 9시면 정확하게 이메일이 배달되었지만 오늘은 30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다. 혹시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연주가 이렇듯 이메일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이메일이 마치 휘발유 같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휘발유없이 움직일 수 없듯 연주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에 그 남자의 편지는 연주에게 하루를 움직이게하는 에너지와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시큰둥한 느낌으로 편지를 받았지만 석 달이 지난 지금은 그 사람에게서 배달된 이메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컴퓨터를 이용하여 인터넷 뱅킹이나 게임, 주식투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 온 사랑에 연주는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소녀였던 연주는 대학교 동창인 지연이가 괜찮은 사이트가 있다는 소개를 받고 가입하자마자 그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연주는 15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문학과 먼 생활을 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영악한 어린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 타인들은 알 지 못할 거라고 늘 스스로를 위안했다. 지난해 말 갑자기 머리가 띵하여 병원에 찾아가니 의사는 장기요양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휴직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신적인 휴양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2년 전부터 수업도중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태가 발생해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키고 교실을 비워야하는 일이 자주 있어왔다. 그때마다 연주는 불안하여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혹시 병원에서 불치의 병이라고 진단이라도 내리면 어쩌나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호동왕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연주는 호동왕자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보내왔던 이메일을 생각했다.

 
- 연주님, 제 아내가 되어주세요. 이승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생김새도 절대 비밀로 하고 오로지
  정신적 연인이 되어 주세요. 꼭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훗날 저승에서 만날 것을 약속할 수
  있어요. -


 가입한 클럽에서 처음 이상한 내용의 이메일을 받고 연주는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클럽에서 시를 감상하고 소녀시절 첫사랑을 그리며 아련한 기분에 빠져있을 때면 비슷한 내용의 이메일이 연주에게 배달되었다.


 첫 번째 이메일 이후 매일 아침 9시면 호동왕자라는 닉네임의 사람에게서 배달되는 이메일을 연주는 제목만 읽어보고 삭제하였다. 한 달을 그렇게 호동왕자의 정성이 가득한 이메일을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만 하던 연주는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는 호동왕자에게 배달된 이메일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명상음악과 아름다운 명화를 배경으로 한 유명 시인들의 시가 예쁘게 편집되어 있었고 맨 아래에는 연주에게 하루의 행운을 빌어주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어떤 날은 호동왕자가 직접 지었다는 좀 유치하지만 연주의 행복을 비는 내용의 시가 배달되기도 하였다. 밤마다 연주에게 보내는 시를 창작하여 아침이면 배달되는 정성이 충만한 이메일이 서서히 연주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읽지 않고 곧 바로 삭제하여 휴지통에 쌓여있던 호동왕자의 이메일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연주는 가슴이 아팠다. 미지의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 치고는 너무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휴지통 비우기라도 했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다며 연주는 그간의 미안한 감정에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호동왕자의 아내가 되어 갔다.

 

 연주는 어떠한 경우라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만나지 말자'는 호동왕자의 제안에 안심이 되었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불륜을 저지르는 요즈음 세태에 염증을 느낀 연주는 보고 싶다면 훗날 저승에서 보자는 말에 호동왕자의 제안이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비감과 아련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벽시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10시를 알리고 있었다. 연주는 순간적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가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호동왕자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11시에 H병원 신경과에 특진을 예약한 상태였지만 연주는 불안과 초조로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삐리릭 -
 “여보세요. 호동왕자님?”


 “여보, 나야 나.”
 “…….


 “나라고.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식탁에 올려놓은 서류봉투를 안 가지고 왔어. 서류통투 식탁 위에 있지?”
 “네에. 잘 있어요.”


 “그런데 여보? 호동왕자가 누구야?”
 “아무도 아니에요.”
 “그래? 혹시 당신 애인 생긴 거 아냐?”


 연주는 호동왕자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모든 의사소통은 오로지 이메일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호동왕자의 전화번호를 알 수 없었다.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한다는 것은 아직 우리사회 정서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연주는 호동왕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스스로 위안하곤 했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자신이 현실과 사이버를 혼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연주는 소름이 돋았다.


 2008년2월28일 밤12시 정각 호동왕자와 연주는 결혼하였다.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두 사람은 사이버 상에서 부부가 되기로 굳게 약속한 것이다. 결혼 후 호동왕자는 아침마다 안부 편지와 함께 회사일과 집안 일을 연주에게 시시콜콜 전해왔고 타인의 방을 엿보는 심정으로 연주는 이메일을 읽곤 했다.


 어제는 호적상의 아내와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였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난 주말 초등학교동창회에 다녀 온 뒤 여자동창으로부터 휴대전화가 걸려 왔는데 호동왕자의 아내는 자꾸만 전화를 걸어 온 여자가 누구냐고 꼬치꼬치 묻는 바람에 대판 싸움을 하였다고 하면서 틀에 박힌 결혼생활에 점점 흥미를 잃고 있다고 했다. 연주는 호동왕자 가정사와 자신의 가정사가 너무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연주는 지난해 가을 남편과 그와 같은 일로해서 부부싸움을 한 사실이 있었다고 답변하면서 여자들의 심리를 요리할 수 있는 처방전까지 알려 주었다. 사이버 남편인 왕자가 현실의 아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병원 특진예약 때문에 집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컴퓨터를 끄려고 할 때 호동왕자로부터 쪽지가 도착했다.

 


  아침부터 중요한 일로 중역회의가 있었어요. 아직도 회의가 끝나지 않아 당신한테 안부
편지도 못 보냈어요. 궁금해 할까봐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쪽지를 보내요. 오늘 병원에
가는 날이라고 했죠? 잘 다녀와요. 내가 곁에 있으면 함께 갈 텐데. 나중에 편지 보낼게요.
안녕 내 사랑.


 

 ‘그러면 그렇지. 왕자님이 일부러 소식을 안 보낼 리가 없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