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7. 8. 28. 00:46

 

 

 




         

 

 

 

 

                                                                                                                                        

 



                         삼 촌(2)

 

 

                                                                                                                                                                          - 여강 최재효 



  한 시가 넘어도 현관문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분께서 좀 전에

나의 인터폰을 받고 의아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

어났다고 감지하고 조속히 일이 마무리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본

인이 직접 나에게 인터폰을 하기보다는 나에게서 인터폰이 오기를 기다

리며 벽시계만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우황청심환 덕분에 놀란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옷 매무새를 단

정하게 하고 진한 향수를 머리칼에 살짝 뿌렸다. CD플레이어에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히트곡 ‘헤이’가 담긴 시디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

다. 감미로운 라틴 사내의 음성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시계가 오후 한 시 이십분이 가리키고 있었다.  갈비찜이 든 냄비와 청

국장을 담은 질그릇 냄비를 다시 가스레인지에 올려 놓고 식탁점검해

보았다. 물김치, 나박김치, 열무김치, 동치미, 고등조림, 콩나물무침, 김,

젓갈, 잡채, 녹두지짐과 두부부침개를 가운데 놓인 신선로를 중심으로

치되어있고 옆으로 약식, 백설기와 인절미를 하얀 사기 그릇에 정갈하게

담겨있고과, 배, 오렌지, 포도를 잘게 썰어 오렌지 주스를 약간 붓고 큼

지막한 화채 그릇에 담아 놓았다.


  탁자 가운데 백장미와 붉은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는 조화 한 바구니를

올려놓았다. 내가 보아도 서울에 있는 어느 고급 한정식 식당 테이블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 분 집으로 인터폰을 연결했다. 이번 에는 여자

가 받았으나 얼른 그 분을 바꾸어 주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좀 전에 남편이 다녀갔어요. 시장하시죠? 어서 내려오

세요.”
  일 분도 안돼서 초인종이 울렸다. 그분은 현관문 앞에서 잔잔한 미소를 흘

리며 서있었다.


  검정색 정장에 감색 넥타이로 멋을 한껏 내고 하얀구두를 신고있었다. 손

에는 자그마한 상자 같은 것이 들려 있었는데 내 시선이 그 상자로 옮겨지자

얼른 나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요.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
  “어머나? 그냥 오시지않구요?”


  작은 상자가 무게가 꽤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상자를 받으며 순간적으

로 안에 들어있을 내용물을 추측해 보았다. 양주 미니어처 아니면 아이들 장

난감 또는 여자 화장품 세트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나는

그 분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내 뒤를 따르면서 그분의 시선이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실크 나이트가운 속의 윤관이 뚜렷한 나의 잘 발달 된 엉덩이 아니면 매끄

럽게 다듬어진 어깨선 그렇지 않으면 거실 장식들을 보며 나의 취향에 대하

여 강한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얀색 식탁보가 덮인

식탁 위에는 하얀색과 붉은색 그리고 녹색의 촛불이 아롱거리며 은은한 빛

을 발산하면서 준비된 음식의 음영을 흔들고 있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음식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한 낮이지만 구름이 잔뜩

낀 탓에 실내등을 키지 않으면 꽤 어두웠다. 식탁 위에 형광등을 키지 않고

벽에 걸리 오렌지색 등에 스위치를 넣었다.


  “애기엄마 취미가 참으로 고상하네요.”
  “…….


  그분에게서 바랐던 말이 아니었다. 난 차라리 내가 바람난 유부녀 같다거

나, 오늘 누구랑 데이트 약속이 있는 것 아니냐 또는 집안 분위기가 너무 은

은하고 나의 의상이 섹시하다는 등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의자를

빼서 그 분에게 앉도록 배려를 하자 싱끗 미소를 지어보였다.


  “차린 게 별로 없어요. 지난번 제가 대접 받던 때와 비교하면 너무 형편 없

어요.“
  “무슨 말씀을. 난 벌써 배가 부른데요.”


  “식사하시기 전에 제가 만든 칵테일을 드셔보세요.”
  “칵테일?”
  “…….


  술에 대하여 전문 지식이 없는 나는 전에 남편이 하던 대로 언더락스 잔

에 각얼음을 채우고 테킬라 1온스 정도 따른 다음 레몬주스를 7부 정도 채

웠다. 그분은 숨을 죽여 가며 나의 손놀림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다음에 잘

익은 체리 한 개를 잔 맨 아래 놓고 잔 테두리에 오렌지둥글게 썰어 장

식하였다.


  신기한 눈으로 나의 손놀림을 바라보던 그 분은 헛기침을 하며 내가 만들

고 있는 칵테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레나딘시럽을 천천히

잔 안으로 흘려 넣자 멋진 술이 탄생하였다.


  “오오, 가정에만 있다는 분이 어떻게 테킬라선셋을…….
  “…….
  “집안에 낙조가 환상적이네요.”


  그분은 감탄사와 함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술잔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테킬라선셋 한 잔을 만들어 한잔은 그분 앞에 또

한 잔은 내 앞에 내려 놓았다.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시장하시죠? 이건 남편이 잘 마시던 술인데 전

잘 모르겠어요. 몇 번 마셔보니까 맛이 괜찮더라고요. 어르신께서 멕시코에

오래 계시다 오셨으니 당연히 멕시코 술을 좋아하실 것 같아 테킬라를 준비

했어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난 뒤 환하게 웃었다.


  “과연 센스가 있어요. 테킬라가 멕시코에서 만들어지는 술이라는 것을 아

는 주부는 거의 없을 텐데. 이 칵테일은 내가 멕시코에서 근무할 때 럼과 함

께 자주 마셨던 유명한 칵테일 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칵테일을 별로 좋아하

지 않아요. 그 곳에 사시는 교포들도 칵테일보다 스트레이트로 마시죠. 그러

나 나는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는 편을 선호해요.


  테킬라선셋(TequilaSunset)이 있고 테킬라선라이즈(TequilaSunrise)가

있어요. 대개의 남자들은 아침해를 좋아하지만 나는 바다로 지는 석양의 노

을을 좋아하지요. 애기 엄마가 나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네요.“


  “어머. 그냥 멕시코에서 오래 계셨다고 하셔서 준비했어요.”


  “내가 서울에 온 이후로 처음 테킬라를 대합니다. 서울에는 유명 호텔 바

(Bar)나 전문 칵테일 코너가 아니면 테킬라를 손쉽게 접할 수 없어요. 그래

서 무척 그립기도 했던 술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미시 바텐더가 만

들어주는 칵테일을 접하니 내가 참으로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이세요?”
  “그럼요.”


  그분은 칵테일  한잔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내가 다시 한 잔을 더 만들어

그분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마땅한 안주가 없었다. 가스레인지에서 끊고

있는 갈비찜을 접시에 덜어 그분 앞에 올려놓았다. 음식이 취향에 맞을지

가슴을 졸이며 그분 눈치를 보았다. 물김치 한 수저 들고 갈비 한 대를 맛보

더니 나에게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보였다.


  “테킬라에 소갈비 찜이 안주로 어울리나요?”
  “사람들은 무슨 술에는 어떤 안주가 궁합이 잘 맞느니 안 맞느니 하는데 내

입맛에 맞으면 궁합이 맞는 것이지. 나는 그런 거 안 따져요. 그냥 술과 맛있

게 먹으면 되는 거지.“


  흑미로 지은 밥과 청국장을 그 분 앞에 올려놓았다. 그분은 생전에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맛본다며 내가 미안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간

남자를 집으로 초대한 것도 나의 성격으로 보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진한 화장을 하고 야한 옷을 입고 있으니 만약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 내가 정신이 나갔거나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났다고 할 것이다. 그분은 내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며 자꾸 건배를 제의

했다. 내가 칵테일을 세잔째 마시고 그분이 준 선물을 뜯어보았다.


  “어머나!”
  “…….
  “이렇게 비싼 것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상자 안에는 붉은색 비단이 깔려있고 그 위에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촛불이 투영된 목걸이는 수십 개의 다

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는데 인조 다이아몬드는 아닌 것 같았다. 결혼할 때

남편이 패물로 해준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비교를 할 수 없었다.


  그 때 남편은 다이야몬드 목걸이를 구입하는데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다며

나에게 은근히 자랑을 했었다. 남편이 사준 목걸이 보다 서너 배 많은 다이아

몬드가 박혀 있었다.


  “어르신, 제가 어떻게 이런 선물을 받아요? 그냥 구경한 것으로 만족할게

요.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전 이런 고가의 선물은 받을 수 없어요. 제가 그

동안 어르신에게 큰 결례를 한 것 같아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그간의 무례를

용서받고 싶었어요.“


  그분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테킬라를 스트레이트 잔으로 따라 반

모금 정도 마시더니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한 듯한 눈치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목걸이 임자를 찾고 있었어요.”
  “목걸이 임자를요?”


  “집사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반

을 처분하여 그 목걸이를 장만했지만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못했어요. 오늘

겨우 그 목걸이의 주인공을 찾아 천만 다행이에요. 목걸이의 값어치가 얼마

건 상관않해요. 반드시 내 인생의 후반부를 함께할 여인에게 줘야한다는 생

각도 해보지 않았어요."


  “…….” 
  그분은 점점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전 처가 죽은 후에 마련한 것이

라면 재혼 할 상대가 목걸이의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데 엄연히 남편이 있

고 아직 어린 남매가 있는 내가 목걸이의 주인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가 가지 않았다. 이미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그분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테킬라의 화력(火力)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홀

리오이글레시아의 시디가 세 번째 반복되고 있었다. 유럽의 노래에 아메리

카의 술이 잘 어울렸다. 다만 마시는 사람이 된장과 고추장에 길들여진 혀를

가지고 있지만 이 순간 만큼은 멕시코 어느 별장에 놀러 온 돈 많은 남자와

요염한 여인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던 그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 좀 들어보려오?”
  “네에, 어르신 말씀하세요.”


  그분의 눈가가 약간 젖어있었다. 나는 얼른 티슈를 뽑아 건넸지만 그 분은

눈 가장자리를 닦지 않았다.


  "지금까지 짧지 않은 세상을 살면서 나는 남자나 여자나 나이가 들면 곁에

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금 나와 살고있는 여인은 타

인이 보기에 다정다감한 부부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계약동거를 하고 있는

여자랍니다."


  “계약동거요?”
  “한 달에 일정한 금액의 급여를 주고 있지요. 그 여자가 하는 일은 나의 하루

세끼 식사를 준비해주고 내가 입던 옷을 세탁하며 자주 집안을 청소하면서 나

름대로 자신의 여가를 즐기고 있답니다.“


  나는 계약동거는 요즘 대학가의 신풍속도로 자리 잡고 있어서 지방에서 올

라 온 남녀대학생들이 생활비를 아끼기 위하여 취하는 이상한 병리현상이라

고 알고 있었는데 초로의 인생을 사는 분들에게도 계약동거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죄송하지만. 잠은 함께 안주무세요?”
  “난 15년 전 아내를 사별한 뒤에 어느 여인과도 잠자리를 같이해본 적이 없

어요. 우리집에 방이 네개인데 항상 방 두개는 텅 비어 있지요.


  “부인을 정말로 사랑하셨나 봐요?”
  “부부간 사랑에 '정말'이 어디 있어요?”
  “죄송해요. 제 생각만 한 것 같아요.”


  “아닙니다.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은 아집이나 병적인 집착이라고 할 수 있겠

지요. 죽은 사람에 대한 집착. 그 집착이 오늘 날 나를 이렇듯 외로운 섬으로

있게 한 것 같네요.“
  “아니에요. 어르신은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아요.”


  “내가 목걸이를 애기엄마한테 선물한 이유는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

지 않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씀인지요? 무슨 병이라도 앓고 계세요?”


  나는 그분에 대한 배려를 조금치도 하지 않은 채 당돌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분은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요즘에는 자주 전 처가 꿈에 나타나거든요.”
  “꿈에 나타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요?”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자꾸 손짓을 하다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곤 해요.“


  “어르신, 함께 사시는 분에게 정을 주시고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시면 되잖

아요. 그럼 덜 쓸쓸하실 텐데요.“


  “아니에요. 그 사람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거나 행방 불망되면 아무 미련

없이 내 곁을 떠나갈 사람이랍니다. 그 여자의 눈빛을 보면 일종의 지배와 복종

관계를 읽을 수 있어요. 돈을 주고 사는 서비스 차원의 복종 관계라고나 할까?“


  “그럼, 평생 혼인을 안 하시고 그냥 지금처럼 사시게요?”
  “평생이라?”


  “네에, 평생이요.”
  “나는 평생이라는 시간의 막바지에 와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것도 같

은데…….


  그분은 반쯤 남은 칵테일을 단 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눈빛이 약간 충혈

되어 있어 눈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자꾸 그분을 다그치며 왜 나에

게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다이아몬드를 주

고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시도라면 나는 몇 억 아니라 몇 백억 짜리 다이

야몬드가 박힌 목걸이라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도 아마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

거나 정신이 돈 사람으로 매도할거에요.“
  “아니 왜요? 젊은 사람들이 고국에 홀아비를 두고 마음이 편치않을텐데요.”


  “내가 제 어미 살아생전에 잉꼬부부로 소문이 날 정도인데 제 어미 죽고 이제

다 늙어서 결혼 운운하면 나를 이중인격자나 육욕에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취

급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어요.“


  이야기를 마친 그분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면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잘못

하면 넘어 질 뻔 했다. 큰 키의 그분이 휘청할 때 전봇대가 쓰러지는 것 같았다.

내가 얼른 일어나 그분을 부측하자 괜찮다고 하였지만 불안했다. 안방에 있는

내 전용 화장실 문 앞까지 간신히 부측을 하여 화장실로 안내했다. 나의 발걸음

도 자유롭지 못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추운 겨울 밖

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처럼 양 볼이며 귀까지 빨갛게 익어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여인들이 사용하는 형형색색의 각종 오밀조밀한 물건들로 가득

했다. 핑크색의 장식장 안에는 질세정제와 오묘하게 생긴 기구, 생리대, 앙증맞은

랑콤의 미라클과 겐조 데떼의 향수병, 바디크린저, 샴푸, 비누, 화장품이 들어있

고 장식장 옆으로 투명한 상자에 남편이 외국 출장가서 사다놓은 딜도우(Dildo)

와 진동기가 있었다.


  장식장 옆으로 손수 세탁한 속옷을 화장실 내에 건조시키는 습성 때문에 핑크

계열색의 손바닥 만한 T자 팬티를 비롯한 레이스 팬티, 꽃무늬 팬티, 위생팬티등

야한 팬티들이 브래지어와 함께 빨래줄에 걸려 있는데 그 분이 젊은 여인의 체취

가 밴 물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5분 정도 있다가 그 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데

찬물에 세수를 한 듯 했다. 화장실 문 앞에 서있는 나를 보자 그 분은 겸연쩍게 웃

었다. 화장 한 얼굴을 차마 찬물로 세면을 할 수 없었다. 빨갈 입술의 여인이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여인이었다.  술집 작부 같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뱃속에 들어 간 음식물은 쉽

게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이 찔러 넣어 보았지만 통증만 있을 뿐이었다. 대충 입안을

헹구고 그분이 있는 식탁으로 갔다.  그분은 나의 전신을 훑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 보았다. '나는 네가 어떤 여자인지 다 알고 있다'라고 눈빛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 그분의 눈빛은 초로의 신사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그 분이 눈빛이 무서워

고개를 푹 숙이고 의자에 앉았다. 그 분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눈을 꼭 감

그 분이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애기 엄마, 내 선의를 받아 줄 실거죠?”
  “…….
  “나는 애기 엄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목걸이의 주인은 애기 엄마라고 단정

했어요.“
  “네에? 제가 왜?”


  그분은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어

불편하였고 그래서 사별한 아내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혼자 사는 여인이 나타나

면 청혼을 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서울 시내를 다녀 보아도 그런 여자가 눈에 띄

지 않았고 이제는 거의 혼자 사는 것이 팔자려니 체념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목걸이의 주인이 나타났다고 기뻐했었단다.


 나이가 맞지 않을 뿐 더러 어린 아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가정주부라고

판단하였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 분이 나만 보면 친절하게 대해주며 온화한

미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애기 엄마가 세상을 버린 내 아내를 꼭 빼 닮았

어요. 마치 처의 쌍둥이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그분의 전처와 빼 닮았다는 이야기에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또 다른 영혼이 위안을 얻거나 평온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죽

은 사람과 비교되어도 좋았다.


  “이제는 세상 사는 게 재미도 없고, 의욕도 많이 잃었어. 밤에 잠자리에 들면 과

연 내가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곤 해요.“
  “아이, 어르신도. 아직도 젊은사람 못지않게 건강해 보이시고 얼굴에 주름살 하

없으신데요. 벌써 그런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래요? 내가 아직도 젊어 보인단 말이지?”
  “그럼요.”


  “내가 오늘 목걸이 주인을 찾은 게 확실해.”
  “그럼. 이 목걸이를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주인이 자기 물건을 지니고 있는데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비록 죽은 사람과 연관 된 목걸이지만 목걸이의 값어치와 화려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목걸이를 차고 일어나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귀부인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면서 거울 속에서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움직

일 때 마다 불빛이 반사되어 오묘한 빛깔을 띠었다. 그 분이 저쪽에서 목걸이를 차

고 이리 저리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잘

어울린다는 찬사도 덧붙였다.


  “고마워요. 그런데 유부녀인 제가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받을 만한 자격이 되니까 내가 선물을 하는 거지. 아무 염려 말아요. 다시 돌려

달라고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식탁 위에 테킬라 두 병이 바닥을 보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또 한 병을 꺼내

오려고 하자. 약한 맥주나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자고 했다. 마침 냉장고에 재어놓은

맥주가 서너 병 있었다. 두 병을 가져와 병마개를 땄다. 알싸한 향과 맛이 혀와 후

각을 자극했다. 


  “우리 이제 후식으로 뭘 들어요.”
  나는 무의식중에 그분과 나를 합쳐서 '우리'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만

나와 그분 사이에 장벽이 없음을 의미했다.


  맥주 두병이 순식간에 빈병으로 변했다. 마지막 한 병을 꺼내와 그 분과 건배를 하며 마셔버렸다. 술이 술을 원하고 있었다.



 홀리오이글레시아의 달콤한 목소리가 나와 그 분 사이를 가깝게 했다. 내가 그 분

손을 잡고 춤을 추자고 이끌었다. 전문 무도학원에서 배운 솜씨는 아니지만 처

녀 때 춤 잘 추는 친구들에게 배운 가락이 있었다. 나와 그분 사이에 엄격한 예절

과 의식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십년만 젊었더라면 그대에게 프러포즈를 했을 텐데…….
  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돌던 그 분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분의 뜨거운 입김이

내 귀속을 간지럽혔다.


  “지금 프러포즈하시고 계신데요?”
  “응? 그런가.”


  우리는 조용히 춤에만 전념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그 분의 다분진 상체에서 느껴
지는 단단함이 청년과 같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남자였다. 그분의 손이

내 허리와 엉덩이를 자극할 때마다 나는 수천볼트에 감전 된 듯 몸을 좌우로 뒤 틀었고 내 하체 가운데 부위에 그 분의 단단함이 스칠 때마다 나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었다. 이 대로 내일 아침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와 그분은 예전부터 연인이나 되었던 것처럼 꼭 붙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

끝났지만 삼십분 정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술기운이 최대한 오른 듯 나는

휘청거렸다. 테킬라와 라거비어가 뱃속에서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분이 먼저 의자에 앉더니 눈을 감은 채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취기를 어떻게 다스려 보려는 것 같았다. 그냥 저렇게 놔두면 의자에서 떨어질 것 같았지

만 그렇다고 그 분을 일어나게 하여 집으로 가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르신, 거실에 소파가 있는데 잠시 기대고 쉬세요.”
  “아니야. 난 괜찮아. 조금 있으면 깰 텐데. 오늘 내가 너무 과했나봐.”
  “제가 쉴 틈도 없이 술을 드려서 그런걸요.”


  “아냐, 내가 기분이 좋아서 과음했는데 뭐.”
  “소파에 기대앉으세요. 식탁 의자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그럼, 잠시 앉아 쉬었다가 갈까?”
  “그렇게 하세요.”


  둘째가 학교에서 바로 학원을 갔다 올 때 까지는 세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나이 드신 분에게 독한 술을 권한 나는 괜히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분은 소파에 앉자마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곧 약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

다. 단잠을 자는 그 분의 얼굴 모습에서 평온함을 볼 수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잠든 그분에게 송구했다. 안방의 침대가 생각났지만 차마 외간 남자를 안방 침

대까지 내 주며 쉬게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같은 분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그분을 흔들어 깨웠다. 금방 눈을 뜬 그분에게  안방 침대에 가서 잠시만 주무

시라고 했다. 그러나 그 분은 괜찮다고 하며 조금만 더 소파에 앉아 쉬겠다고 했다.

나의 눈꺼풀도 천근만근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분을 흔들어 깨워 안방 침대에서

쉬었다 나오시라고 했지만 그분은 극구 사양하며 술이 깨면 일어날테니 나에게 가서 쉬라고 하였다. 나는 술이 올라 내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그분 귀에대고 속삭였다.


  “제 침대가 너무 넓고 쓸쓸해요. 우리 그리 가서 잠시 쉬어요.”
  그리고 나는 나의 대뇌 활동이 거의 정지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시간이 얼마간 지속 되었다. 나는 한 마리 비둘기가 되어 창공을 날고 있었다. 내

뒤를 씩씩한 비둘기가 따라 오고 있었고 얼마 안 되어 두 마리 새는 둥지에 들어

정겨운 몸짓으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딩동 -.
  둘째 아이가 학원서 돌아 온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눈은 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늘게 눈을 뜬 상태에서 누워 있었다. 안방문이 벌컥

리면서 곧 작은 아이의 화난 음성이 들였다.


  “엄마, 왜 방에 있으면서 문을 안 열어주는 거야?”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온 녀석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내가

투정을 받아주지 않자 아들 녀석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둘째는 자주 잠자다 말고 내 침대로 와서 나를 안고 잠이들곤 했다. 초등학교 학생이지

아직은 젖먹이 아이나 다름 없었다. 


  “엄마, 샤워했어?”
  “아니, 왜?”
  “엄마가 아무것도 입고있지 않아서 물어봤어.”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순간 나는 사력을 다해 일어나 얼른 거실로 나가보았다.

 그 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들에게 나의 비밀스러운 행

동이 탄로 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면서도 찝찝했다. 내가 왜 벌거숭이로 침대에

누워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하체로 부터 미열(微熱)이 물결치

듯 잔잔하게 느껴졌다. 식탁위에는 그분이 선물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황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