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에 빠지다
- 2006. 11. 22 12:20 필자가 촬영한 백록담
백록담에 빠지다
- 여강 최재효
주선(酒仙)의 혼몽에서 깨기도 전에
내장을 말끔히 비우고
천근이 된 머리를 가볍게 하여
잠이 덜 깬 성산(聖山)에 조심스레 길을 놓는다
아침 해가 저만치서 싱싱하게 웃고있다
사계절로 범벅이 된 수채화속에
나도 그림이 된다
고단하고 지루한 노역(勞役)이
몸에 익숙해져 있을 무렵부터
나의 키가 자라나고
산은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산은 역시 화려한 명성에 어울렸다
오랜 터줏대감, 갈까마귀들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비상한다
십년지기처럼 다정하다
하얀 하늘바다에 몸을 던져 노를 젖는다
저 아래, 사바가 시야에 들어오고
하늘은 성큼 내려 앉아있다
산은 무덤처럼 조용하다
나무대신 잡초들이 겨우
산의 치부(恥部)를 가리고 있다
한 자 만큼이나 산이 자랐다
긴 낮잠에 빠져있는 봉우리는
뒤 늦은 낯선 사내의 손길에 수줍어하며
얼른 하얀 사(紗)로 몸을 휘감는다
환희의 도가니 안에 파도가 치고있다
2006. 11. 22.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