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를의 땅
- 프리하 까를교(橋) 위에서 필자 -
해외여행 기행문
(1) 까를의 땅
까를이란 생소한 이름이 내가 이방인(異邦人)이란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고색창연
하면서도 약간은 음침한 천년 고도(古都) 프라하, 내 상상해왔던 프라하와 현실의 프라하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했다.
나를 태운 붕새는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죽의 장막’을 거침없이 날며 해와의 경주
(競走)를 시작했다. 새는 황사의 발생지인 내몽고와 중국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사막을
기로질러 날았다. 곧 우리 옛 선조들의 발자취가 서린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를 지날
때는 환국(桓國)을 생각했다. 이어 우랄산맥을 넘어설 때는 유럽대륙 까지 호령했던
칸(Khan)의 호령이 귀를 아프게 했다. 유럽인들은 최근 칸(Khan) 이후 1000년 만에
‘그들이 다시 온다‘고 두려워하고 있다.
해가 붕새를 앞질러 대서양으로 몸을 숨기자 지상을 뒤덮은 구름은 거대한 용광로로
변했다. 5000미터 고공에서 보는 프라하의 모습은 한여름 밤 명멸하는 은하수와 흡사했다.
공산권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기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란 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대면하는 프라하의 야경은 이전에 본 그 어느
대도시보다 화려 했고 마치 중세 백작부인을 보는 듯 했다.
대형 버스편으로 프라하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부터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공항에
연계된 대로(大路) 가운데 가로등 마다 설치 된 SAMSUNG과 LG이 홍보간판이 슬라브인
들보다 앞서 일행을 맞아 주었다. 콧날이 시큰하고 곧 눈물이 쏟아 질 뻔했다. 유럽인들이
‘그들이 다시 온다’고 두려워 한다는 말이 사실로 증명된 셈이다. 역시 밖에 나와야
애국자가 되는가 보다. 거만한 크로마뇽인들의 콧대를 꺾어놓은 기업인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온통 사각의 모양의 검은 돌을 촘촘히 박아 도로를 만든 체코인들이 답답해 보이기도
하면서 전통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마음에 이해가 갔다. 서울에서는 60년대 사라진 전차가
프라하 대로 한가운데를 달리는데 프라하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이국(異國)의 나그네 눈에 비친 프라하의 모습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말한다면
틀린 표현일까? 어둠 속에 숨을 고르고 있는 프라하는 까를4세라고 하는 거인(巨人)의
그림자속에 있었다. 밤거리를 거니는 오똑한 콧날의 늘씬한 금발의 프라하 아가씨를 보는
순간 끈적한 여독(旅毒)은 금방 눈 녹듯 했다. 여명(黎明)속에서 꿈틀대는 프라하는
부지런해 보였다.
서양식으로 간단히 조식(朝食)을 마치면서 나는 까를의 발자취를 밟아보았다. 1333년
후에 까를4세로 즉위되는 까렐대공이 프라하에 입성했을 때 그는 성이 매우 황폐해져 있는
것을 보 고 낙담했고 그는 곧 최대한으로 역량을 발휘해 성과 왕궁, 다리등 기초시설들을
확장, 재건하기 시작했다. 1344년 건축가 마티아스(Master Mathias) 와 뻬뜨르 빠를레슈
(Petr Parler)의 도움을 받아 지어진 성 비트대성당은 프라하 성과 전도시를 특징짓는 대표
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또한 이때 로마네스크 왕궁 채플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모든 성인들의 교회역시 오늘 날
훌륭한 고딕 건축물로 남아있다. 이러한 건축물들과 그 외의 몇 가지 첨가 부분들로 까렐
4세의 프라하 성은 위엄 있는 황제의 거처가 될 수 있었으며 프라하를 새롭게 탄생 시킨
왕으로 지금도 프라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까를4세 이름이 붙은 많은 건축물들과
시설물들이 7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프라하 시민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통치자로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지난해 유럽에서 최고로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머문 도시가 프라하라고 한다. 우리와
비슷한 GNP, 깨끗하고 편리한 시설과 관광사업 종사자들의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천년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매력이 프라하에 이방인들에게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것
같다. 필자가 돌아본 수많은 까를4세의 작품 중 수작(秀作)은 우리나라 SBS방송가 지난해
제작GO 인기리에 종영 된 ‘프라하의 연인’의 촬영한 장소로 알려진, 그래서 수많은 한국인
들의 얼굴을 매일 대할 수 있다는 ‘까를교(橋)’였다.
폭10m 길이520m의 석축교(石築橋)로 1357년에 착하여 49년 만에 완공 되었다. 다리
난간 좌우에는 청동으로 주조 된 30개의 성인상(聖人像)들이 아름다운 까를교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 시키고 있다. 까를교 밑으로는 유람선들이 평화롭게 흐르고 멀리 프라하성과
고고한 듯 서있는 비트성당등 수많은 고 건축물들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마치 한 폭의 서양
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쉽다. 야경은 더욱 환상적이었다. 마침 필자가 찾았을
때의 까를교의 야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강 좌우에 펼쳐진 도시의 우아한 야경은 말할 것도
없지만 까를교는 프라하 야경 중 단연 백미(白眉)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직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왕궁을 방문하면서 나는 수많은 의문부호를 남겼다. 고딕식의
대통령궁과 성당을 나오다 들린, 1924년 41세로 요절한 체코의 문호(文豪)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가 자주 다녔다는 카페, Kafka를 들어가 보았다. 아릿다운 아가씨가 동양의
방문자를 보고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카페안은 카프카의 냄새로 가득했다. 길지않은 생을
살다간 카프카, 여섯명의 여인과의 염문이 없다면 그의 생애도 꽤나 무료했을 것이다. 잠시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도라 뒤만트(Dare Diamant)와 종업원 아가씨의 얼굴을 오버랩(Over
Lap)시켜 보았다.
- "여기를 떠날 뿐이야. 여기서 나가는 거야. 어디까지라도 가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 -
그의 꽁트 "출발" 중 한 부분을 혼자 중얼 거리면서 하루 종일 시달린 발을 위로해 본다.
공산화에서 탈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움울하고 침체되었을 것이란 인상은 프라하 어디에도
찾기 힘들었다. 단지 흠이라면, 물론 그네들 음식문화에 기인된 것이라 판단이 되긴 하지만
프라하 시내를 활보하는 중년여성 대부분이 거대한 하체와 남성들의 남산만한 배가 눈에 거슬
렸다. 섬유질을 많이 섭취하는 우리네 식단에 나는 안도하며 조상들께 감사해 했다.
- 계속 -